"돈은 없고, 몸값은 지키고 싶고"…스타트업의 선택은 [마켓인]

미국서 스케일업 활발한 원인은 '벤처대출' 활성화
과거 '위험 감수' 인식 컸지만 이젠 '불확실성 속 기회'
벤처대출 각광받자 세계 운용사들 관련 펀드 결성 속속
일부 운용사, 대출형 투자 검토 대상에 韓 기업도 포함
  • 등록 2023-01-17 오후 6:16:18

    수정 2023-01-17 오후 6:28:13

[이데일리 김연지 기자] “모두가 공포에 빠진 상황에서 과거 기업가치(밸류에이션)를 고수하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기업가치를 깎아가며 추가 에쿼티를 조달하기보다는 대출형 투자로 대규모 희석을 막으면서도 필요 자금을 신속히 유치할 수 있었다.”

지난 2020년 팬데믹 여파로 ‘궁지에 몰렸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에어비앤비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스닥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네이선 블레차르지크 공동창업자가 한 인터뷰에 남긴 말이다.

네이선 블레차르지크 에어비앤비 공동창업자./사진=게티이미지
2020년 초 에어비앤비는 팬데믹 풍파를 정면으로 맞으며 창립 이래 최대 위기에 놓인다. 팬데믹 여파로 여행 수요가 줄자 영업실적이 덩달아 뚝 떨어지며 상장 전 자금 조달 계획 등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시장 불확실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에어비앤비는 통 큰 결정을 내린다. 약 10%의 고금리와 주식전환권리 부여 조건으로 사모펀드인 실버레이크와 식스스트리트파트너스로부터 10억달러(약 1조2398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기로 한 것이다. 일각에서 ‘궁지에 몰린 회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금을 조달해 급한 불 끄기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 배경이다.

그로부터 약 8개월 후 에어비앤비에 마법같은 일이 펼쳐진다. 약 1000억달러(약 108조원)의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으며 나스닥에 상장한 것이다. 고금리를 물고 펀딩을 진행할 당시 밸류에이션(180억 달러)과 견주면 5배가 넘는 규모다. 실버레이크 컨소시엄도 해당 투자로 1조 원의 차익을 기록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경기 불황 속 벤처대출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서로 윈-윈(win-win)하는 사례를 남긴 셈이다.

미국서 일찍이 떠오른 벤처대출…스케일업 요인

경기침체 여파로 글로벌 벤처캐피탈(VC)들이 투자를 꺼리는 상황에서 후속투자가 절실한 스타트업들 사이 ‘벤처대출’이 새로운 자금조달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 라운드 대비 낮은 기업가치로 후속투자를 유치하는 대신 운용사 등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원활한 경영 활동을 전개하며 위기를 극복하자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벤처대출이란 VC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은 벤처기업에 제공되는 모든 형태의 대출을 일컫는다. 성장 단계의 기업들이 주주 지분을 과도하게 희석하지 않으면서도 전통 금융권 대비 저렴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옵션으로 꼽힌다.

이를 통해 벤처기업은 후속 지분투자 전까지의 기간을 연장할 수 있고, 지분 희석을 방지해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 기관들은 스타트업에게 2~5년간 대출을 해주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출금액의 10~30% 수준의 신주인수권(워런트)를 받는다. 통상 금리는 5~15%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다수의 기업이 성장 단계별 지분 투자 유치뿐 아니라 벤처대출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왔다. 실제 에어비앤비와 우버, 페이스북, 구글, 스포티파이 등은 운영 초기 매출과 담보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벤처대출을 통해 필요 자금을 조달했다.

다우존스 벤처소스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미국에선 약 28%의 벤처기업이 벤처대출을 받았다. 중소기업연구원에서는 미국에서 스케일업(scale up, 단기간에 매출과 고용 측면에서 급성장하는 기업)이 활발한 주요 요인으로 벤처대출을 지목하기도 했다.

경기침체 장기화에 벤처대출펀드도 속속

세계 스타트업들이 자금 위기에 봉착하면서 벤처대출펀드를 결성하는 운용사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예컨대 싱가포르 기반의 자산운용사 ‘라이트하우스캔톤’은 최근 2000만달러(약 247억6600만원) 규모로 1호 벤처대출펀드의 1차 클로징을 마쳤다. 해당 펀드는 인도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권 국가에서 VC 자금을 조달한 이력이 있는 성장 단계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회사 측은 올해 말까지 1억 달러(약 1238억 원) 규모로 펀드를 마감하는 것을 계획 중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일찍이 벤처대출펀드 결성을 완료한 곳도 있다. 홍콩계 사모펀드인 PAG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며 이름을 알린 인도 기반의 에델바이스자산운용은 지난해 10월 약 3억 6100만달러(약 4470억3000만원) 규모로 벤처대출펀드를 결성했다.

사모펀드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인포메이션 등 외신에 따르면 세계 1위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은 지난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약 2조5000억 원 규모의 스타트업 크레딧 투자를 준비 중이다. 세계 기술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벤처대출과 후기 스타트업 메자닌 투자 등을 집행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벤처펀드 결성을 추진 중인 한 외국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벤처대출은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50년 넘게 자리 잡은 투자 전략”이라며 “구글과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등도 한때 경영을 원활히 전개하고 주주 지분 희석을 막는 차원에서 벤처대출을 활용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는 유망한 IT 스타트업이 즐비한 만큼, 대출형 투자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하우스가 꽤 있다”며 “침체기가 지속되는 현 시기 벤처대출의 역할은 보다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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