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는 무역의 중심입니다. 매년 전 세계 무역량의 80%가 바닷길을 통해 운반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면 무역은 바다 위 선박 없인 이뤄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선박을 조금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적은 비용으로 물건을 주고받으며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선박 운항의 효율성과 안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술은 ‘자율운항 선박’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 지능항해시스템 조감도 (사진=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사업 통합사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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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순엽 기자] ‘자율운항 선박’을 정의하는 표현은 기관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무인 선박, 스마트 선박, 디지털 선박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기도 하죠. 공통된 점을 꼽아보면 ‘선박 스스로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제어해 운항하는 기술’이란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정돕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자율운항 선박을 MASS(Maritime Autonomous Surface Ship)라고 하고 ‘수면에서 사람 개입 없이 또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운항하는 선박’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현재 운항하는 선박에도 자율운항(오토파일럿) 기능은 있습니다. 다만, 해당 기능은 선장과 선원의 역할을 지원하는 수준에 그치죠. 바다는 육지처럼 길이 뚜렷하게 있지도 않고 이정표도 없어 까다롭습니다. 이에 선박 접안 등 세밀한 조종은 아직 사람의 몫입니다. 아직은 선원의 주된 업무인 견시를 대신해주고 의사를 결정하는 데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해 상황에 대한 통찰을 키워주는, 낮은 단계의 자율운항 기술이 쓰이고 있는 셈입니다.
| IMO 자율운항선박 단계별 정의 (표=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사업 통합사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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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O는 4단계 수준으로 나눠 자율운항 기술 수준을 정의합니다. 1단계는 선원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수준, 2단계는 선원이 승선한 상태에서 원격 제어하는 수준, 3단계는 선원 없이 원격 제어하는 수준을 뜻하죠. 여기까진 부분 자율운항 기술이라고 부릅니다. 4단계에 이르러서야 선박 운영체제가 스스로 결정·운항하는, 완전 자율운항 기술이 적용된 선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운·조선업계가 미래 성장 동력으로 주목하는 기술도 완전 자율운항 기술이죠.
선박이 완전 자율운항을 하기 위해선 △상황 인식·탐지 기술 △플랫폼 기반 판단 기술 △조치·제어 기술 △인프라 제반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황 인식·탐지 기술로는 날씨·물체 등을 정확히 인식하고 플랫폼 기반 판단 기술로는 실시간 수집·예측되는 데이터를 토대로 판단하죠. 조치·제어 기술로는 앞선 판단을 기반으로 선박 제어를 인공지능(AI) 수행하는 기술, 인프라 제반 기술은 자율운항 선박이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항만에서의 기술 등을 말합니다.
| 삼성중공업 연구원들이 신규 개발한 오버 헤드 디스플레이로 충돌 회피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사진=삼성중공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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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부족 문제’ 해결 방안으로 주목…인적 사고↓IMO가 지난 2018년 제99차 해사안전위원회에서 자율운항 선박 운용 시 영향을 미칠 해사 안전·보안 관련 14개 국제 협약 제정 착수에 합의한 이후 조선·해운업계의 자율운항 선박을 향한 관심과 투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습니다. 한국은 물론, 노르웨이·핀란드·미국·일본·중국·싱가포르 등 조선·해운 강국들을 중심으로 자율운항 선박 기술 개발과 시험 항해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기죠.
조선·해운 강국들이 자율운항 선박에 관심을 두는 가장 큰 이유는 효율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운항에 인간이 관여하는 부분이 줄어들수록 효율은 오르기 마련입니다. 자율운항 선박은 기존 선박 대비 25% 이상의 운용비용 절감 효과를 낼 것이란 분석 결과도 있죠. 일반적으로 상업 선박 운용비용 중 연료비와 인건비가 80% 이상을 차지해 자율운항 기술로 이를 줄일 수 있다면 해운 업계의 수익성 개선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 자율운항선박 기대효과 (그래픽=해양수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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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국내에서 불거진 선원 부족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주목받기도 합니다. 2030년이 되면 한국인 선원 공급이 수요보다 2710명 부족하리란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죠.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로 폭을 넓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해운 전문 컨설팅 업체 드류리(Drewry)는 오는 2027년엔 전 세계 선원 공급 부족 규모가 5만5000명에 이르리라고 내다봤죠. 이 같은 상황은 조선·해운업계가 자율운항 선박 개발에 더욱 힘쓰게 하는 요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결국, 완전 자율운항 기술이 실현된다면 선원 거주 공간과 통로, 안전 장비 등이 전혀 필요 없어 이를 제거한 공간에 화물을 더 실어 운항 효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선박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도 인간 탑승을 고려하지 않으면 항해에 최적화된 구조로 배를 만들어 연비를 높일 수도 있겠죠. 이 때문에 서비스 차별성이 낮고 경쟁이 치열해 수익성이 그다지 높지 않은 해운 산업이 한 층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란 관측도 나옵니다.
아울러 안전사고 우려도 줄어듭니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 조사 결과 지난 2016~2020년 일어난 국내 해양 사고 80%는 ‘항해 도중 전방 경계 소홀’, ‘항행 법규 위반’ 등 인적(人的) 과실이 이유였습니다. 자율운항 선박을 활용하면 사고 위험이 그 만큼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죠. 1500여명이 한 번에 사망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등 해양 사고 대부분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전성 측면에서라도 자율운항 선박은 개발될 필요가 있습니다.
| HD현대의 자회사 아비커스(Avikus)가 오는 2025년부터 운행할 자율운항 솔루션이 탑재된 미래 해상택시 조감도. (사진=아비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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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법률 등 풀어야 할 문제 많아…“패러다임 전환”아직 자율운항 선박 상용화까지 갈 길은 멉니다. 기술이나 시장 문제 외에도 규제, 법률, 보험 등 아직 풀지 못한 비(非)기술적 문제가 많기 때문이죠. 자율주행 선박도 현재는 선박법, 선원법, 선박안전법 등 관련법 규제를 받습니다. 규제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자율주행 선박은 사람이 승선하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법규를 누가 책임지고 준수할지 기준이 모호해지기도 하죠. 자율주행차량이 상용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를 비슷하게 겪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업계에선 기술의 성숙도가 확보되고 사회 인프라가 구축되면 자율운항 선박 도입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자율운항 선박은 조선 시장뿐만 아니라 해운물류 전반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산업 분야”라며 “각국 조선사들은 자율운항 선박 시장을 선점해 미래 조선 산업을 주도하는 선두주자가 되고자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