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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장순원 기자] 리콴유 전 총리는 앞날이 불투명했던 신생 독립국 싱가포르를 오늘날 강소국 반열로 끌어올린 지도자다. 특히 서구와 다른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를 내세우며 아시아 신흥국의 롤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생존을 위한 개방‥신생독립국서 강소국 반열
싱가포르의 면적은 718㎢로 서울(605㎢)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1965년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했지만 별다른 자원도 없고 인구도 적은 소국(小國)이었다. 국가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리에 취임한 리 전 총리는 경제성장에 매진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리 전 총리는 도시국가인 싱가포르가 내수 경기에 의존하기 어렵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길목으로 교역이 활발한 무역도시라는 점에 착안해 적극적인 개방에 나섰다.
또 미래를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싱가포르 항만공사를 설립해 세계 일류 수준의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했고, 석유파동 속에서도 미래에 대비해 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했다. 당시 국내에서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리 전 총리를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장기적 안목의 투자는 싱가포르를 물류 중심지, 동서양 항공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또 세계 유명 금융기관을 적극적으로 유치해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일으켰다.
아시아는 서구와 다르다‥강력한 리더십 구축
리 전 총리의 통치 철학은 ‘아시아적 가치’다. 아시아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효용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한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카리스마와 두려움의 독특한 조합”이라며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신흥 개발국의 롤 모델이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과의 인연 각별‥생년 4번이나 찾아
리콴유 총리는 한국과 인연도 각별하다. 그는 10·26사태 발발 1주일 전인 1979년 10월 19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총 4번 한국을 찾았다.
2000년 9월 출간된 회고록 일류 국가의 길에서 리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의 첫 인상에 대해 “날카로운 얼굴과 좁은 콧날을 지닌 작고 강단 있게 생긴 분으로 엄격해 보였다”며 “영어를 할 줄 아는 그의 20대 딸 박근혜의 통역으로 우리의 대화는 진행됐다”고 박 대통령은 당시 작고한 모친인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또 리 전 총리는 1981년 창이공항 건설공사에 참여한 현대건설의 젊은 사장, 이 전 대통령을 집무실로 불러 5분짜리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고 이 대통령이 깊은 인상을 받아 국정운영에 이를 반영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이었던 1994년 미국의 유력 정치평론지 ‘포린어페어’ 기고문을 통해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다. 경제 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할 수 있다는 아시아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