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닐 수 있다. 오랜 기간 케이팝 업계에 몸담은 서울대 동문 간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새 국면을 촉발시켰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에는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이유가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연초 1조2000억원의 자금을 유치한 카카오엔터테인먼트(카카오엔터)를 의식한 결정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에 나서지 않으면, 자칫 업계 패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공격적인 인수전 참여 배경으로 꼽힌다.
|
하이브는 지난 10일 이 전 총괄이 보유한 지분 가운데 14.8%를 4228억원에 인수하면서 에스엠 최대주주로 뛰어올랐다. 하이브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일반주주를 대상으로 지분 공개 매수에 나섰다. 내달 1일까지 에스엠 소액주주가 보유한 보통주 지분 25%를 주당 12만원에 사들이기로 했다. 이를 합해 40%에 육박하는 지분으로 최대 주주 자리를 공고히 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이브의 등장을 두고 이 전 총괄과 에스엠 이사회 간 갈등이 주요 원인 아니었느냐란 관측이 우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달 7일 카카오가 에스엠 지분 9.05%를 확보해 2대 주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거버넌스 개선을 명목 삼아 이사회와 카카오가 지분을 사고팔면서 창업주인 이 전 총괄을 압박하는 그림을 연출했다.
복수의 원매자들과 경영권 매각을 두고 장기간 협상을 이어가던 이 전 총괄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회사 경영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촉발된 순간이었다. 서울대 선후배이자 오랜 기간 연예계 인연으로 맺어진 방 의장에게 경영권 인수를 제안했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전 등장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앞선 이유 외에도 한층 다양한 이유가 녹아있다. 방 의장이 자선 사업가가 아닌 이상 ‘사 달라고 해서 사줄’ 이유도 없거니와, 하이브 입장에서 에스엠 인수는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어서다. 증권가에서는 하이브가 이 전 총괄 지분과 공개 매수에 들어갈 자금이 1조137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이브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지난해 3분기 기준)이 9030억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곳간을 탈탈 털어 인수에 나서야 하는 셈이다.
|
자본시장 설명을 종합하면 하이브는 에스엠 경영권 인수 얘기가 나올 때부터 잠재적 원매자로 꼽히고 있었다. 카카오(035720)나 CJ ENM(035760)처럼 협상 테이블을 꾸리면서 구체적으로 덤비지 않았을 뿐, 인수에 대한 의지는 늘 품고 있었다고 한다.
변수는 이 전 총괄의 매각 의지였다. 이 전 총괄은 에스엠 경영권 매각 논의를 정해진 기간에 끝낸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건을 맞춰본 뒤 만족스러우면 팔고 아니면 팔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회사 내부에서도 ‘쌤(이 전 총괄의 회사 내 명칭) 의중이 중요하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매각 협상이 수년간 이어진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분위기가 급변했고 분위기 전환 카드가 필요한 순간, 방 의장의 손을 잡았다는 말도 나온다.
카카오엔터는 지난달 ‘미스터 에브리씽’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이끄는 국부펀드인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와 싱가포르투자청(GIC)으로부터 각각 6000억 원씩 총 1조2000억 원 규모 투자를 유치했다. 국내 콘텐츠 기업이 받아낸 해외 투자 유치액 가운데 최대 규모이자 카카오 계열사 내에서도 역대 최대 투자다.
이 과정에서 카카오엔터가 인정받은 기업가치만 11조원 수준이다. 해당 수준을 유지하며 기업공개(IPO)에 성공할 경우 하이브를 누르고 최대 규모 엔터사로 발돋움하는 셈이다. 2조7000억원대 규모의 상장사이자 아이돌 명가로 꼽히는 에스엠 경영권까지 꿰찬다면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하이브 입장에서 공격적인 경영권 인수가 더 났다고 판단한 이유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하이브 입장에서는 에스엠 인수로 업계 1위 지위를 유지하는 한편 잠재적 경쟁자를 견제하는 두 가지 목적이 깔려 있다”며 “때마침 불거진 에스엠의 경영권 분쟁을 하이브 입장에서 입지 강화로 승화시키려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