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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그것만으로 당청은 ‘치킨게임’(한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 다 파국인 게임)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의 재의요구안을 표결에 부치느냐 마느냐도 초미의 관심사다. 이에 더해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면충돌로 비화될 가능성도 상당하다.
현실화되면 당청관계 파탄…행정부·입법부 충돌도
키를 쥔 청와대 기류는 거부권 행사 쪽으로 기울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당초 국회법 개정안 원안에서) 딱 한 글자 고쳤던데 그렇다면 우리 입장이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정 의장의 중재안은 ‘대통령령·총리령·부령 등 행정입법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는 국회법 개정안 문구 중 ‘요구’를 ‘요청’으로 바꾼 게 골자다. 강제성을 일부 완화하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직 위헌 요소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다른 관계자는 “헌법 수호의 임무를 진 대통령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헌법 제53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박 대통령의 재의요구안은 국회 본회의에 ‘부의 예정’ 상태로 넘어오게 된다. 첫 번째 분수령은 이를 재의결할지 여부다. 본회의 상정은 여야 간 협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국회의장의 결단이 필요하다. 국회 관계자는 “결국 의사일정은 국회의장이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화 역할론’이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받는 이유다.
여권 일각에서는 경우에 따라 박 대통령의 탈당 혹은 유 원내대표의 사퇴까지 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권 한 관계자는 “당 의원들 입장에서 박 대통령의 거부권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이냐 비박이냐를 가를 선택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계파 갈등이 추후 본격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야당 한 관계자는 “재의결만 되면 우리로서는 꽃놀이패”라고 했다.
가장 최근 거부권 행사가 이뤄졌던 2013년 1월에도 여야는 표결하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중교통 육성 및 이용촉진법 개정안을 다시 검토해달라고 국회에 요구했을 때다.
朴 거부권 행사 안할 수도…“정치적 실익 크지 않아”
더 나아가 행정부와 입법부간 전면전으로 흐를 가능성도 크다. 국회 일각에서는 여야의 반응보다 정 의장의 ‘상정’ 결단을 더 주목하는 시각이 많다. 절차상 표결 권한은 정 의장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거부권 행사가 현실화되면 정 의장은 재의결을 강행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정 의장이 주도한 중재안이 여야 간 잇단 합의의 산물인 만큼 입법부 수장으로서 마냥 물러설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다.
다만 청와대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청와대로서도 그 실익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 많아서다. 거부권으로 인해 여당 원내지도부가 사퇴한다면 청와대는 국정 운영부터 벽에 부딪힐 게 유력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친박(친박근혜) 성향의 원내대표가 새로 앉는다고 해도 사태가 수습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방적인 당청 관계에 대한 불만만 더 쌓일 것이란 얘기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도 박 대통령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국민과 직접 관련이 작은 거부권 정국이 펼쳐지면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더 떨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