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유럽서 ‘대세’로 떠오른 극우 물결에 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승부수를 던진 조기 총선을 앞두고 정치 혼란이 깊어지고 있다. 프랑스 정통 보수 우파를 자처하던 공화당이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정당 국민연합(RN)과 손잡겠다고 하자 당 대표를 전격 제명키로 했다. 정치 노선을 둘러싼 내홍이 갈수록 깊어지며, 프랑스에서 사상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 12일(현지시간)프랑스 공화당은 극우정당 국민연합(RN과 조기총선에서 연대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에리크 시오티 대표를 해임했다고 밝혔지만, 그는 여전히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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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프랑스 공화당은 이날 오후 긴급 정치국 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극우와 연대를 결정한 에리크 시오티 당 대표를 제명하기로 했다. 당 관계자들은 기자회견에서 “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다.
공화당은 지난 9일 마무리 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단 6석(7.2%)을 얻어 5위에 그쳤다. 이에 시오티 대표는 지난 11일 극우와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공화당의 오랜 금기를 깨고 RN과 이번 조기 총선에서 연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프랑스 선거 역사상 공화당이 극우 정당과 연대를 꾀한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에 당 기조와 달리 사전에 충분한 논의와 협의 없이 이뤄진 당 대표의 돌발 발언에 내부서 불만이 폭발했다. 제프로이 디디에 공화당 사무총장은 “당 대표를 물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22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던 발레리 페크레스 일드프랑스 주지사도 “영혼을 팔았다”고 맹비난했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부진했지만, 프랑스 공화당은 정통 보수 우파 정당으로 프랑스 현대 정치사에 발자취를 남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정당이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샤를 드골과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등을 배출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극단주의에 맞서 싸워 왔기에 반(反) 이민 정책과 한때 프랑스의 유럽연합(EU) 탈퇴까지 주장하며 포퓰리즘적 공약을 내세우는 극우 정당인 RN과 달리 중도적인 정책을 선호한다.
이처럼 정치 노선의 결이 다름에도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 이어 총선에서도 약진이 예상되는 RN과 연대해 표심을 얻겠다는 계획에 당 안팎에서 충격에 휩싸였다. 공화당 출신 현직 장관 7명은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드골 장군의 후계자들이 세운 이 당의 모든 것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앞서 마크롱 대통령도 “악마의 거래”라고 비난했다.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내무장관은 공화당의 2차 세계대전 직전 프랑스와 영국 등이 나치 독일과 맺은 뮌헨협정에 빗대기도 했다.
그러나 제명 소식에 시오티 대표는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오늘 개최된 회의는 당규를 명백히 어긴 채 진행됐다”며 “이 회의에서 이뤄진 어떤 결정도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원들이 선출한 우리 정당의 대표이며 앞으로도 대표로 남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 11일(현지시간) 프랑스 조기 총선을 앞두고 프랑스 정당들이 연정을 구축하려는 가운데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조던 바르델라 대표가 파리의 RN 당 본부를 나서고 있다. (사진=로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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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최근 유럽의회 선거 압승을 이끈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가 차기 프랑스 총리로 급부상하고 있다.
틱톡 팔로워가 150만명이 넘는 바르델라 대표는 ‘극우 틱톡왕’으로 불리며 2030 프랑스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RN은 최근 유럽선거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라 조기 총선에서도 마크롱 대통령 소속의 르네상스를 누르고 제1당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만약 RN이 과반을 넘길 경우 바르델라가 총리에 올라 ‘동거정부’가 탄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