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영민 기자]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는 ‘비속(卑屬) 살해’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생활고나 건강을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하지만 정부는 안전망을 마련하기 위한 기본 단계인 피해 통계 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관련 법안은 수차례 발의됐음에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국가가 비속살해 사건을 분석해 사건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 (사진=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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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따르면 지난 9일 충남 태안의 한 주택가에서 일가족 3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숨진 부부가 평소 소아 당뇨를 앓아온 딸을 치료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고 구체적인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부모에 의한 사망사건은 한 달 전에도 발생했다. 전북경찰청 등에 따르면 지난달 13일 오후 1시쯤 전북 익산시의 한 아파트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녀들의 목에 남은 흔적과 40대 가장 A씨가 평소 빚 독촉에 시달린 점을 미뤄 볼 때 A씨가 아내와 자녀들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생활고를 비관하며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는 반복되고 있다.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이 보건복지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2013~2020년 자살전수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 자녀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60명으로 한 해 평균 20명에 달했다. 구체적인 피해자 통계가 없는 것을 고려하면 비속살해로 발생한 피해자 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비속살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부모나 조부모에 의한 비속살해가 잇따르지만 관련 통계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비속살해는 공식 죄명이 아니어서 경찰 범죄통계에 별도 항목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지난 2021년 국회에서는 아동학대사망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비속살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자는 취지의 법안(김상희 의원 대표발의)이 무려 여야 139명 의원의 동의를 얻어 발의됐지만 예산 등을 이유로 계류됐고 아직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만약 오는 5월 국회에서도 외면받는다면 이 법안은 폐기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실태조사를 위한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경제적 고립과 간병 부담으로 인한 비속살해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며 “한계에 다다른 이들의 사정을 조사해 필요한 자원과 인프라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가족 동반 자살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므로 ‘가족 살해’란 큰 틀 안에서 국가가 통계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사회돌봄시스템에 반영해야 한다”며 “사회복지 시스템을 누구나 받을 수 없는 환경이 궁극적인 문제다. 재발방지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