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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롯데를 국내 재계 5위로 일군 ‘거인’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영면에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고난과 역경 끝에 성공을 거둔 악착같은 기업인으로, 다른 이에게는 자신의 영역에서 ‘챔피언’이 된 존경스러운 인물로, 가족에게는 따뜻한 가장으로 기억된 신 전 명예회장은 생전 아꼈던 자신의 고향 울산 울주군 선영에 몸을 뉘었다.
22일 장지로 떠나기 전 서울 롯데월드몰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한 영결식에는 부인인 시게미쓰 하츠코 여사와 아들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직계 가족과 친지, 지인, 그룹 임원진 등 1500여 명이 참석했다.
신 전 부회장의 아들 신정열 씨가 영정사진을, 신 회장의 아들 신유열 씨가 위패를 들고 영결식장으로 들어오며 시작된 영결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장남인 신 전 부회장은 “아버님은 롯데그룹 직원들과 롯데 고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며 “선친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가겠다”고 고인을 기렸다.
영결식 추도사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맡았다. 이 전 총리는 직접 단상으로 올라와 추도문을 낭독했다. 그는 신 명예회장을 ‘선각자’로 칭하며 “모든 국민이 굶주림에서 해방돼야 한다며 시작한 식품 사업에서부터 관광, 유통, 화학 등 당신이 일으킨 산업들이 지금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며 “매순간마다 나라경제와 국민의 삶을 생각한 신념과 도전 정신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영상을 통해 추도사를 전했다. 반 전 총장은 “명예회장님은 우리들의 삶이 어두웠던 시절, 경제성장의 앞날을 밝혀준 큰 별이었다”며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위에서 국가재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조국의 부름을 받고 경제부흥과 산업발전에 흔쾌히 나섰으며 기업보국의 사명감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내셨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전날까지 꾸려졌던 빈소에도 각계각층 수많은 인사들이 찾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정확한 인원 집계는 안 됐지만 조문객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롯데그룹 측은 설명했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박희태 전 국회의장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도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여기에 전 야구선수 박찬호와 전 권투선수 홍수환 등 스포츠계 인사에 이르기까지 고인의 생전 모습을 추억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향년 99세, 백(百)에서 하나(一)를 뺀 백수의 나이까지 롯데그룹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창업자가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롯데는 본격적인 2세대 경영 체제로 운영될 전망이다.
아버지의 별세 직전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던 신동주·신동빈 두 형제는 장례식장에서 마주하게 됐다. 이 자리를 계기로 두 사람 간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경영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동생인 신 회장이 우위에 있는 모습이다. 일본 롯데홀딩스 주요 경영진의 지지를 단단히 받고 있으며, 한국 롯데는 이미 스스로 장악해 지배구조 개편까지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껌에서 시작해 123층 높이의 롯데월드타워를 건립한 신 명예회장은 신뢰를 바탕으로 어떤 분야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경영 철학을 갖고 있었다. 유통과 화학, 호텔, 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2세대 경영자 신 회장 역시 선친의 철학을 바탕으로 경영 활동을 이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