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는 눈 앞의 물가 상승보다 장기적으로 다가올 저(低)성장 우려에 더 무게를 뒀다. 10페이지 짜리 취임사에서 `인플레이션`이란 단어는 고작 한 번에 그쳤다.
“장기적으로 저성장 고민해야”
이 총재는 21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고 서울 중구 부영 태평빌딩에서 취임식을 열었다. 이 총재는 취임사에서 “단기적으로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예상보다 빠른 통화정책 정상화, 오미크론 변이 확산에 따른 중국의 경기 둔화 가능성 등이 통화정책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한층 고조되는 가운데 경기 회복세가 기존 전망보다 약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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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재는 “성장과 물가 간 상충 관계(trade-off)가 통화정책 운용을 더욱 제약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정책을 운용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작년 8월과 11월엔 ‘빚투(빚을 내 투자)’에 따른 가계부채 급증과 부동산 가격 폭등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고 올 1월과 4월엔 물가에 더 초점을 맞춰 금리를 인상했는데 앞으론 성장 둔화 우려로 인해 성장, 물가 둘 중의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기 힘들어 성장과 물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채권시장에선 5월 연속 금리 인상설과 7월 인상설이 엇갈리고 있다.
이 총재는 지금 당장은 인플레이션이 문제이지만 1~2년 이후엔 저성장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것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취임사에서 인플레이션이란 단어는 단 한 번만 등장했고 장기 저성장 수렁에 어떻게 하면 빠지지 않을 것인지로 모아졌다.
이 총재는 “제 마음이 무거운 것은 비단 당장의 정책 결정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며 “긴 안목에서 보면 한국 경제는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코로나 위기 이후 한 단계 더 도약할지,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로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 국면에 빠져들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경제정책 프레임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며 “정부가 산업정책을 짜고 모두가 밤새워 일한다고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제는 민간 주도로 보다 창의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 소수의 산업, 국가로 집중된 수출과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구조개혁을 통한 자원 재배분을 서둘려야 한다”고 말했다. 소득 양극화, 국가·가계부채 관리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한은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 총재는 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 받은 후 “한은의 임무는 단기적 성과보다 거시경제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거시 경제 안정을 위해 쓴소리도 하겠다”며 “조용한 조언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조언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기존까지 한은 총재는 정부 정책에 대해선 아예 입을 닫아왔다. 그러나 19일 청문회에서 이 총재가 보여준 모습은 달랐다. 이 총재는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부동산정책 등에 대해서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이 총재는 취임사에서도 직원들에게 이를 당부했다. 이 총재는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의한 연구 성과를 책상 서랍 안에만 넣어 둬서는 안 된다”며 “한은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민간부문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지성을 갖춘 적극적 조언자(intellectual leader)’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 직원 개개인의 전문성도 강조했다. 이 총재는 “제가 IMF에서 근무하며 가장 좋았던 점은 어떤 이슈든 그 분야의 전문가를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궁금한 사항에 대해 전화 한 통이면 몇 권의 책을 찾아 읽는 것보다 더 빠르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은 직원도 한국 경제에 대해 각자 맡은 분야의 대표 선수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