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불법 외국인 노동자의 딸이 한국 초등학교에서 학급 어린이회장을 맡은 사실이 화제를 낳고 있다.
‘어른 세계’에서 하층계급으로 대우받는 피부색 다른 불법 체류자의 딸이 ‘어린이 세계’에서 어떻게 한 반의 리더로 올라설 수 있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녀를 리더로 뽑은 어린이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잘하잖아요?”
“타니아는 운동을 잘해요.” “타니아는 남을 잘 도와줘요.” “타니아는 한국말을 우리보다 잘해요.” “타니아는 공부를 잘해요.”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초등학교 연꽃반 어린이들은 방글라데시 소녀 타니아(11)를 어린이회장으로 뽑아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모든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니아는 지난 3월 12일 연꽃반 어린이회 선거에서 회장에 입후보했다. 후보는 타니아를 포함해 8명. 천마초등학교에 외국인이라곤 타니아 1명이기 때문에 나머지 경쟁자 역시 한국 어린이였다. 타니아는 또렷한 한국말로 “친구들, 선생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전체 42명 학생 중 타니아를 선택한 학생은 16명. 압도적인 1등으로 당당히 당선됐다.
어린이회장은 반장, 부반장보다도 높은 학급의 최고 리더. 매주 금요일, 기업 이사회 같은 학급회의인 어린이회를 주재하고, 2주일에 한 번씩 학급신문 ‘울반신문’을 만든다. 연꽃반의 이사장이자 발행인인 셈.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지 3년째,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지 2년6개월 만에 타니아는 리더에 오른 것이다.
타니아는 2000년 4월 방글라데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엄마 파르빈(31)을 따라 한국에 왔다. 엄마는 한국에서 신발공장에 취직했으나 공장 압축기에 손이 끼어 두 달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8년 전 한국에 온 아빠 타줄 이슬람(39)은 이미 합법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 노동자 신분으로 살고 있다. 동생 파미나는 아직 말도 잘 못하는 한 살.
물론 타니아가 처음부터 잘 적응한 것은 아니다. 한국말도 서툴렀고, 무엇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아이들의 작은 말에 쉽게 상처를 입었다. “피부가 검다고 ‘숯검댕이’라고 놀렸어요. ‘왕따시키자’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었어요. ‘못된 짓만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타니아는 “학교 입학을 후회한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타니아에게 용기를 준 것은 선생님. 우선 타니아를 입학시키준 교장선생님의 배려가 있었다. 최기홍(57) 교장선생님은 “20년 전 이란에서 한국인 교사로 근무할 때 불법으로 중동을 떠돌던 한국인 부모의 아이들을 가르쳤다”며 “불법 체류자 단속에 걸려 이란을 떠나던 우리 어린이들 모습이 눈에 걸렸다”고 말했다.
작년 담임을 맡았던 윤혜은(여·51·현 남양주 와부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은 전격적으로 타니아를 학급 체육부장에 임명했다. 축구, 피구, 달리기 등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천부적인 운동신경이야말로 타니아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는 빠른 길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판단은 적중했다. 윤 선생님은 “체육시간과 방과 후마다 한국 아이들을 뒤로 몰고다니는 타니아의 모습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타니아의 노력도 대단했다. 타니아와 함께 학급 부회장을 맡고 있는 정영호(10)군은 “타니아가 받아쓰기 시험 문제를 읽을 때 귀에 가장 쏙쏙 들어온다”고 말했다. 한국말 능력이 한국 어린이보다 낫다는 얘기다. 타니아는 작년 외국인 한글 글짓기 대회에서 두 번 입상한 경력도 있다. 현재 4학년 연꽃반 담임 우지현(25) 선생님은 “(티나아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 지도까지 해준다”고 말했다.
타니아의 꿈은 중·고교를 거쳐 의대에 진학하는 것. “고향(방글라데시 다카)에 돌아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꿈을 이루려면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 한국에서 쫓겨날 수 있는 아빠, 손을 다쳐 다시 노동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엄마의 장래, 타니아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학비를 내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타니아는 이런 현실을 잘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