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IOI가 보여준 우애와 협동

류한수 상명대학교 교수
  • 등록 2016-08-16 오후 3:27:02

    수정 2016-09-06 오전 11:09:55

[류한수 상명대 교수] ‘우리는 그 얼굴에서 죽음을 보았다’라는 러시아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레닌그라드의 1941~42년 겨울이다.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빈사 상태에 빠진 시민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굶어 죽던 암담한 시절이었다. 영화 말미에서 굶주림을 이겨낸 발레 연습생들은 독일군에 맞선 힘겨운 전투에 찌들어 생기를 잃은 군인들 앞에서 위문공연을 한다. 연습생의 춤을 즐긴 뒤 환호하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시고 활력이 넘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산업화된 사회일수록 엔터테인먼트는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과 놀이가 분리된 현대에 엔터테인먼트는 하나의 산업이 된다. 시장 규모와 이윤율이 날로 커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불꽃 튀는 싸움터가 된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대중문화계도 몰라보게 기업화되고 치열해졌다.

이런 변화는 2006년에 나온 영화 ‘라디오 스타’에 잘 나타나 있다.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는 인기를 잃고 골칫덩이가 된 1988년 가수왕 출신 왕년의 스타 최곤(박중훈 분)을 버리지 않고 친동생처럼 보살핀다. 박민수가 마련해준 영월 라디오 디제이 자리에 앉은 최곤이 좌충우돌 끝에 인기를 되찾자 서울의 기업형 연예기획사 임원이 찾아온다. 그는 최곤에게 좋은 계약을 제시하며 다시 꽃길만 걷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조건을 하나 내건다. 친형 같지만 구닥다리 매니저 박민수와 관계를 끊으라는…. 그 장면을 보노라면 합리적이지만 얼음장 같은 그 임원의 눈빛에 등이 싸늘해진다.

고민하던 최곤은 의리파 박민수를 버리지 않았지만, 2016년 현재 기업형 연예기획사는 연예 지망생이라면 꼭 들어가고 싶은 꿈의 직장이다. 스타를 만들어 띄우는 기획사와 계약을 맺지 않고서는 타고난 인재도 대중의 눈에 띄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연예계는 막연한 감과 의리가 아닌 철저한 기획과 타산이 지배한다.

이 추세의 절정이 올해 한 케이블 음악방송 채널이 만든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이었다. 크고 작은 46개 연예기획사의 걸그룹 연습생 101명이 매주 개인이나 팀 별로 미션을 수행하고 그 과정을 지켜본 시청자가 점수를 매기고 그 결과에 따라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어 마지막에 걸그룹 데뷔조 11명이 추려진다는 이 프로그램은 2016년 걸그룹 생태계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고, 그 여파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프로듀스 101’이 금요일마다 케이블 방송 시청률 기록을 경신하며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에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본 필자는 홀린 듯 ‘입덕’해서 모임 날짜를 금요일 저녁으로 잡은 고교 동창을 핀잔할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프로듀스 101’에 빠져들고 그 결과물인 프로젝트 걸그룹 I.O.I의 행보에 일희일비하는 팬은 특정 연령대와 성별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I.O.I의 팬덤은 퍽 강하며, 최종 11위 안에 아깝게 들지 못한 연습생들로 결성된 파생 그룹 C.I.V.A와 I.B.I의 인기몰이도 무서울 정도다.

대중은 기성품으로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툭 나오는 걸그룹보다 완제품이 되는 과정이 공개되는 걸그룹에 더 환호한다. 이 추이를 포착해 극대화한 프로그램이 바로 ‘프로듀스 101’이었고, 이 전략은 대박을 터뜨렸다. 하나같이 다 데뷔가 절실한 연습생 101명을 넉 달 가까이 경쟁에 몰아넣어 90명을 차근차근 떨어뜨리고 최종 승자 11명을 추려내는 프로그램 포맷은 무척 비정했다.

‘프로듀스 101’의 성공 비결 하나는 그 치열한 경쟁을 지켜보며 느끼는 야릇한 긴장감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다른 성공 요인은 살벌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연습생 소녀들이 보여준 우애와 협조였다. 앞선 연습생은 뒤처진 연습생을 이끌고 함께 갔다. 그들은 무대에서 매력을 뿜어내는 경쟁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격려했다. 이런 모습에 시청자는 감동했다. 악마의 편집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경쟁과 협동의 비율을 잘 조절한 연출자의 감각은 놀라웠다.

‘프로듀스 101’ 시즌 2, 시즌 3이 시청자를 기다린다. 성공을 꿈꾸는 연습생은 더 많이 몰려들어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할 것이다. 향후 ‘프로듀스 101’의 성공은 그런 모습을 더 잘 잡아낼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류한수 상명대 유럽현대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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