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유림 기자] “아유 말도 마요, 잠이나 제대로 잤겠어요, 덜덜덜 떨었지.”
서울 양천구·구로구 일대 3만 8000여 가구 주민들이 끔찍한 한겨울 밤을 보냈다. 비교적 높은 기온이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찬 기운이 역력한 날씨인 상황에서 지난 17일 오후부터 갑자기 온수·난방이 중단되며 불편을 겪은 것이다. 서울 양천구청 앞에서 만난 주민 남모(48)씨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간밤 추위에 몸서리를 쳤다. 남씨는 “처음에는 (18일) 오전 중 복구될 것처럼 말하더니 나중에는 오후 3시나 돼야 할 것 같다더라”고도 말했다.
| 18일 서울 양천구 신정3동주민센터에서 주민들이 전기요를 빌려가고 있다. 전날 신정가압장에서 발생한 펌프 가압 장치 밸브 누수로 양천구와 구로구 일대에 온수와 난방 공급이 중단됐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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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에 따르면 전날 오후 3시 54분쯤 양천구 신정가압장에서 펌프의 밸브 시설 점검 작업 도중 밸브 하단부가 파손돼 온수가 분출했다. 이 사고로 일대 온수·난방 공급이 멈췄다. 가압장은 먼 거리로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송수 압력을 높여주는 시설이다. 시는 통합지원본부를 설치하고 굴착기·덤프 트럭 등 장비 15대와 인원 200여명을 투입해 복구에 나섰다. 열 공급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재개됐다.
이 사고 탓에 주민들은 22시간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고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날 이데일리가 만난 20·30·40대 젊은 연령층은 “하루만 견디면 되니 참을 만 했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고령의 어르신과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들은 타격이 컸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양천아파트에 거주하는 김모(79)씨는 “어제 전기장판 두 개 켜놓고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니까 다리가 저릿저릿 아프더라”며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찬물에 얼굴만 겨우 세수했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만난 또 다른 주민 강모(77)씨는 “귀가 안 좋아서 그런 건지 방송 소리가 작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온수가 끊겼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며 “아무것도 모르고 한겨울에 찬물 샤워를 해야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신정동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 만 3세, 0세 아이를 키우는 정모(34)씨는 “난방은 전열 제품을 사용해 어느 정도 버틸 만했는데 온수가 끊긴 게 문제였다”며 “아이를 씻기려고 물을 끓여 써야 했다. 위험하고 번거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 18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신정가압장에서 펌프 가압 장치 밸브 누수 관련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는 이날 오후 2시 복구가 완료됐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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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를 피해 인근 찜질방과 카페로 ‘피신’을 가는 경우도 많았다. 양천아파트에 사는 김모(60)씨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는 출근한다고 아침부터 사우나에 갔다”며 “어제 저녁 아예 거기서 잠을 잔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네방네 (난방을)다 쓰니까 버티질 못하고 망가진 것 아니겠나”라며 “소중함을 알고 아껴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대 동사무소와 관리사무소도 각종 민원에 대응하며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한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서울에너지공사로부터 전달받는 내용을 어제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1시간마다 방송했다”며 “복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양천구 신정3동 주민센터 대강당에는 한파대피소가 마련되기도 했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이날 12시 기준으로 전기요 228개가 대여됐다”며 “대피소에 계실 분들을 위해 담요와 추리닝 등이 담긴 긴급구호세트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오세훈 시장도 사고 발생 후 사고 현장에 직접 방문해 재난현장지원버스에서 상황판단회의를 주재하고 신속한 지원을 당부했다. 서울시는 향후 가압장 펌프 등 노후 장비 교체와 지속적인 점검을 통해 사고 재발을 막고, 시민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