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들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오십이만 오천 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우리들 눈 앞에 놓인 수많은 날. 오십이만 오천 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1년의 시간.”
여기까지만 읽고 멜로디가 떠오르셨다면, 당신도 뮤지컬 ‘렌트’를 관람하신 거겠네요. ‘렌트’의 대표 넘버인 ‘시즌스 오브 러브’(Seasons of Love)의 첫 구절입니다. 3년 만에 돌아온 ‘렌트’를 얼마 전 다시 본 뒤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 뿐”…마음을 움직이는 ‘렌트’ | 뮤지컬 ‘렌트’ 2023년 공연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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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렌트’는 뮤지컬에 대한 편견을 깨게 해준 작품입니다. 2007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을 정말 우연히 봤습니다. ‘렌트’를 보기 전까지는 뮤지컬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대사 대신 노래를 하는 형식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렌트’는 달랐습니다. 물론 영어로 본 공연이라 작품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렌트’는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 뿐”(No day, but today)라는 가사가 특히 그랬죠.
‘렌트’는 지난달 11일부터 서울 강남구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습니다. 3년 전인 2020년에도 관람을 했었는데요. 그때는 코로나19 팬데믹 초창기로 함성도 지를 수 없었던 터라 공연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만난 ‘렌트’는 3년 전보다 작품 자체가 더 탄탄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무엇보다 이번에 ‘렌트’를 다시 보면서 세 가지 키워드가 떠올랐습니다. 에이즈, X세대, 그리고 조나단 라슨입니다.
작품은 1989년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배경으로 이곳에서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가난과 에이즈의 공포 속에서도 꿈과 사랑을 잃지 않는 청춘들의 이야기인데요. 작가 겸 작곡가인 조나단 라슨이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을 바탕으로 실제 친구들의 이야기를 녹여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치기 어린 X세대 이야기, 에이즈도 정면으로 다뤄 | 뮤지컬 ‘렌트’ 2023년 공연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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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을 당시 많은 이들이 놀란 것 중 하나는 바로 에이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렌트’의 주요 등장인물 중 무려 4명(로저·미미·엔젤·콜린스)이 에이즈를 앓고 있는 것으로 등장하는데요. 80~90년대까지만 해도 에이즈는 많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루돌프 누레예프, 키스 해링 등 많은 예술가들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었죠. 한편에서는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맞서는 예술가들도 있었습니다. 국립극단이 2020~2021년 선보였던 토니 쿠쉬너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톰 행크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필라델피아’ 등이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혹자는 에이즈가 완치까지는 아니어도 치료법이 생긴 지금, ‘렌트’가 보여주는 에이즈 공포를 공감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냅니다. 그러나 이번에 ‘렌트’를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에이즈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에이즈는 단순한 질병을 넘어 우리에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의 메타포로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까지 겪었던 코로나19 팬데믹도 어떻게 보면 에이즈와 같은 공포였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하나 떠오른 것은 바로 X세대였습니다. 정확히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말하던 X세대입니다. 미국의 X세대는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가리킵니다. 이번에 ‘렌트’를 보면서 X세대를 대표하는 몇몇 할리우드 영화가 떠올랐어요. 그 중 하나는 바로 1994년 개봉한 영화 ‘리얼리티 바이츠’입니다.
‘리얼리티 바이츠’는 배우로 잘 알려진 벤 스틸러가 직접 극본과 감독을 맡고 에단 호크와 위노나 라이더 등과 함께 출연한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 설정이 ‘렌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위노나 라이더가 분한 주인공 레이나가 ‘마크’의 마크처럼 비디오카메라로 친구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는 것이 그랬습니다. 꿈과 현실, 돈을 벌 수 있는 일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동성애의 편견이 담긴 것도 그러했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충우돌하는 청춘의 이야기는 강력한 에너지가 있음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원작자 조나단 라슨이 궁금하다면? 영화 ‘틱, 틱… 붐!’ | 뮤지컬 ‘렌트’의 작가 겸 작곡가 조나단 라슨. (사진=신시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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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조나단 라슨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나난 라슨은 80년대 후반부터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만들겠다며 고군분투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브로드웨이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렌트’의 브로드웨이 공연 개막을 하루 앞두고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했죠. 이 안타까운 비극이 ‘렌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시즌스 오브 러브’는 원래 2막 중간에 등장하는 넘버였지만, 조나단 라슨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에서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공연 시작 전 불렀고 이후 2막 처음에 등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만약 ‘렌트’를 본 뒤 조나단 라슨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틱, 틱… 붐!’을 추천합니다. ‘틱, 틱… 붐!’은 조나단 라슨이 ‘렌트’ 이전에 완성한 첫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조나단 라슨의 미완성작으로 남은 뮤지컬 ‘슈퍼비아’ 제작 과정을 바탕으로 만든 자전적인 작품이죠.
영화에서 ‘슈퍼비아’의 정식 공연화에 실패한 조나단은 매니저 로자로부터 이런 조언을 듣습니다. “다음 작품은 네가 잘 아는 것에 대해 써.” 조나단 라슨이 잘 아는 것은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 자신이었습니다. ‘틱, 틱… 붐!’, 그리고 ‘렌트’로 이어지는 메시지죠. 조나단 라슨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유효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을 충실히 살 것, 무엇보다 우리 주변의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 뮤지컬 ‘렌트’ 2023년 공연 장면. (사진=신시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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