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나보고 '개근 거지'래" 한마디에 항공 티켓 끊는 엄마들

성실함의 척도 '개근', 체험학습 못 가 개근한다는 의미 '개근 거지'로 비하
초등생때부터 부모 경제력 따른 계층화 경험…'전거', '월거' 등 각종 혐오 표현 난무
"정체성 미확립 아동기 때 '계층' 알게 되면, 위화감·자괴감 따른 트라우마 가능성"
"같이 성장할 실질적 기회 제공해야...커뮤니티 자정 작용 필요"
  • 등록 2023-06-21 오후 5:03:33

    수정 2023-06-21 오후 5:03:33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과거 학교생활에서 성실성의 척도로 인식되던 ‘개근’이 ‘거지’라는 말과 어울려 ‘현장(교외) 체험 학습’을 갈 만한 형편이 못되는 아이들을 비꼬는 혐오 표현으로 확산되면서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몇 년 간 해외여행을 못 떠나면서 자취를 감춘 듯 보였던 이 표현은 최근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 국면 전환에 따른 해외 여행 재개로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공동체 내에서의 자정 작용과 함께 아이들에게 다양한 구성원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아이 ‘개근 거지’ 말 듣자 여름 휴가 계획 변경...“휴먼시아 친구들은 돈 없어?” 말에 참담함

경남 양산시에 사는 직장인 A(42) 씨는 최근 초등학교 4학년 딸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 전 하교한 딸에게서 들은 “엄마, 애들이 나보고 ‘개근 거지’래”라는 말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개근 거지’란 표현은 현장 체험 학습(이하 체험 학습)이 일반회되면서 생겨난 말이다. 체험 학습은 학교장 재량으로 일년에 40일 가량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종의 학생 연차 개념이다. 학생들은 미리 신청서를 내면 원하는 때에 별다른 제재 없이 체험 학습을 다녀올 수 있다. 체험 학습 후 형식적인 사후 보고서만 내면 ‘출석 인정 결석’으로 처리된다.

주로 가족 여행이나 친지 방문 등의 목적으로 학습 부담이 덜한 초등학생들이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체험 학습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에 매일 출석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같은 아이들을 놀리면서 낙인 찍는 역할을 하는 말이 바로 ‘개근 거지’다.

맞벌이 사정으로 아이의 체험 학습을 신경쓰지 못했던 A씨는 자신의 아이가 받았을 상처에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남편과 상의해 올 여름 휴가 계획을 변경했다. 애초 8월 중순께 계획하고 있던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아이 학교가 여름 방학을 시작하기 전인 이달 말로 바꾸고 항공권 예약까지 마쳤다.

문제는 ‘개근 거지’ 같은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계층화 내지는 혐오 표현이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거(주공아파트 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 전거(전세 사는 거지), 월거(월세 사는 거지), 반거(반지하 거지), 빌거(빌라 거지) 등의 혐오 표현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실정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직장인 B(38) 씨도 지난해 초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서 “엄마, 휴먼시아에 사는 애들은 돈이 없어? 애들이 ‘휴먼시아 거지’라고 해”라는 말을 듣고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같이 성장하는 또래’라는 인식 갖게 해야”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 한목소리로 우려감을 표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초등학생이 ‘개근 거지’라는 말을 듣게 되면 아동기부터 계층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며 “특히 어릴 때는 아직 정체성이 확립돼 있지 않은 데다, 성인들과 달리 계층 이동 방법이나 극복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층민이라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위화감이나 자괴감이 커질 수 있고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 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 그것이 교육에까지 투영되면서 (친구들끼리) 실질적으로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이 되고 있다”며 “또 그간 주로 거주지를 중심으로 동질화된 아이들이 모여 교육을 받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학습이나 경험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문제들이 심각하게 부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근 자체를 창피하고 무의미한 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업 동기를 저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맘카페 등에는 징검다리 연휴일 경우 한 학급의 절반 이상 학생들이 평일 하루 체험 학습을 신청하고 결석하면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경험담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임 교수는 “워라밸이 중요시되는 요즘 직장생활의 분위기가 학교로까지 전이된 게 아닌가 싶다”며 “하지만 회사와 달리 학교에선 여전히 성실성이 중요하고, 개근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라고 말했다.

가장 교육적이어야 할 교실에서조차 이처럼 가장 비교육적인 행태가 자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실질적인 교육과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구 교수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이라는 식의 전달하는 수준의 교육이 아니라, 좀 더 실질화된 교육이 필요하다”며 “아이들에게 여러 부류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같이 성장하는 또래’라는 생각을 스스로 익힐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사람에 대한 존중인데, 여러 다른 여건을 바탕으로 차별을 조장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매우 지양해야 할 부분”이라며 “커뮤니티 자체에서, 이 같은 표현이 부추겨지거나 확산되는 부분에 대한 자정 작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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