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630兆 국민연금을 제대로 지키는 길

  • 등록 2018-08-07 오후 12:29:00

    수정 2018-08-07 오후 12:29:00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사회주의를 근로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라고 정의한다면 미국이야말로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다.”

현대 경영학의 대부로 추앙받는 피터 드러커는 지난 1976년 펴낸 `보이지 않는 혁명(The Unseen Revolution)`에서 미국에서의 연금사회주의 도래를 과감하게 역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급격히 늘어난 연금 납입금 덕에 몸집을 불린 퇴직연금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빠르게 미국 대기업들의 지배적 소유자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목도한 드러커는 퇴직연금의 실질적인 주인인 노동자가 기업들을 지배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불어난 퇴직연금이 오히려 앞다퉈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에게 비용 절감과 구조조정을 강요했고 이는 주인인 노동자들의 이익에 반하게 됐다. 그렇게 연금사회주의는 현실화하지 않았고 이런 아이러니는 연금사회주의를 낡고 고루한 개념으로 퇴색시키고 말았다.

이처럼 이제는 하나의 망령으로만 떠돌고 있던 연금사회주의가 2018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활했다. 국민 노후자금인 630조원대의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집사(steward)` 역할을 제대로 해보겠다며 국민연금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의결권 행사지침)를 도입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투자 기업에 대해 제한적 경영 참여를 결정한 일 때문이다. 당사자인 재계는 물론 학계와 정계 등 전방위적인 압박을 감안해 기금운용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임원 선임과 해임, 합병·분할 등 안건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는데도 말이다.

고작 1~2%도 안되는 지분을 가진 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입맛은 다 맞춰 주면서 국민연금기금만은 그래선 안된다는 논리는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다. 더구나 국민연금기금은 아직까지 자본시장법상 의결권 주식 5% 대량 보유시 공시해야 하는 5%룰과 10% 이상 투자 기업에 경영 참여 주주권을 행사하면 6개월 내 단기차익을 반환해야 하는 10%룰에 묶여 있다. 5%룰은 2020년에 개정할 예정이고 10%룰에는 예외를 둘 수 없다는 게 금융당국 입장이고 보면 국민연금기금의 적극적 경영 참여는 상당기간 수월치도 않다.

국민연금기금이 바닥을 드러내는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40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이 기금을 안전하면서도 보다 높은 수익을 얻는 쪽으로 굴릴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집사의 고대 히브리어인 `oikonomos`는 `집`을 뜻하는 `oikos`와 `관리하다, 몫을 나누다`라는 뜻의 `nemein`에서 온 말이다. 수 천년 전에 쓰여진 구약성경 욥기 역시 집을 잘 관리하고 그 몫을 나누는 일, 그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게 청지기(집사)의 일이라고 권고한다. 이제는 생명력조차 떨어진 연금사회주의 운운하며 기금운용위원회가 제한적인 집사 노릇 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아선 안될 일이다.

물론 전(全)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일부 우려를 해소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모호한 경영 참여 기준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는 있다. 판단 자체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기금운용위원회와 그 아래 수탁자책임위원회가 어떤 방식으로 경영 참여 여부를 결정할지 원칙을 세우는 편이 좋다. 또 기금운용위원회 구성상 정부 입김이 셀 수 있는 만큼 정부 영향력에서 벗어나 연금 가입자의 이익을 위해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거버넌스를 개선하고 전문성 높은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과거 정권에서 정부 쌈짓돈 역할을 하거나 정책의 시녀 노릇을 했던 일들이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기업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젠 재계가 나서서 국민연금기금에 힘을 실어줘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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