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하정민기자] 제아무리 잘 나가던 최고경영자(CEO)라 해도 경영성과가 부진하면 가차없이 내쳐지는 것이 기업문화의 생리다. 최근 위르겐 슈렘프 다임러크라이슬러 회장(60)이 바로 이 문제로 퇴진 위기에 몰렸다.
자회사인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와 미국 크라이슬러의 거듭되는 경영난, 한국
현대자동차(005380)와의 불편한 관계 등으로 슈렘프는 40년간 몸담았던 다임러에서 물러날 위기에 처했다. 1998년 세계 자동차업계를 놀라게했던 크라이슬러 인수 당시 "합병 후 최대 걱정거리는 미국 본사의 흡연실 비치 여부"라며 여유를 부렸던 그였지만 불과 6년 만에 하루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슈렘프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임러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은 그 당시에도 "사상 최악의 합병"이란 조롱을 받았고 지난해 주주총회에서는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최대 주주인 도이체방크와 쿠웨이트 정부 등이 그를 퇴진시키려 시도했었다. 작년 말에는 미국 비즈니스위크(BW)가 선정한 최악의 CEO에 뽑히는 수모도 겪었다.
이같은 비판에 아랑곳앉고 굳건히 권좌를 지키던 그였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미쓰비시자동차와의 관계단절은 투자실패나 재무부담 증가 등으로 단순히 치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쓰비시차나 현대차와의 협력 문제는 두 업체를 축으로 아시아를 비롯, 세계 시장에서 선두주자가 되겠다던 다임러의 야심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슈렘프는 자신이 구상한 세계경영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나라"고 타박했다. 신문은 "전투에 패한 사무라이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살벌한 비유를 곁들이며 슈렘프의 오판이 다임러를 망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1974년 다임러에 입사한 슈렘프 회장은 1995년 회장직에 올랐다. 이후 직원 6만명을 해고시키고 35개 사업부문 중 10여개를 없애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 1년만에 매출을 20% 증가시켰다. 이를 통해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슈렘프는 크라이슬러 흡수합병, 미쓰비시차 지분 인수 등을 잇따라 단행하며 다임러의 지배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인수대상 선정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GM, 포드, 도요타 등에 밀려 미국에서 이름만 `빅3`로 남은 크라이슬러는 그룹이익을 계속 까먹고 있고 미쓰비시자동차의 경우 투자원금을 회수하지도 못할 처지다. 그나마 현대차 지분가치가 투자 당시보다 배 이상 늘어난 10억달러를 기록, 유일한 성공 사례로 남아있지만 현대차와의 관계 악화는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평가가 많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최근 슈렘프를 포함한, 다임러 경영진에 대한 사기혐의 재판도 속개됐다. 미국 카지노 재벌 커크 커코리언은 지난 2000년 다임러-크라이슬러의 합병으로 손해를 봤다며 다임러 경영진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 사건 재판은 3년간 열리지 않았으나 최근 미국 법원이 재판을 속개해 커다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합병 당시 크라이슬러의 최대주주였던 커코리언은 "다임러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할 계획이었으면서도 동등한 합병이라고 속였다"며 "크라이슬러의 주가도 이후 큰 폭 하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주가는 지난 5년간 줄곧 하락세다.
한편 슈렘프는 아직 동요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날 다임러의 대변인은 "슈렘프 회장이 사임할 것이라는 소문은 완전한 `사실무근(nonsense)`"이라며 "29일 개최될 경영감독위원회의의 의제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외신들은 다임러가 이달 29일 뉴욕에서 경영감독위원회를 열어 슈렘프의 퇴진 문제와 향후 아시아 전략을 논의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슈렘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간 언론과의 접촉을 즐기던 그가 입을 다물고 잠행을 지속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WSJ은 다임러 이사회가 슈렘프가 주장했던 미쓰비시차 추가 지원을 거절했던 것만으로도 슈렘프의 퇴진이 임박했음을 점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어쨌든 슈렘프에 대한 투자자들과 금융시장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다임러에서 9년간 장기집권하는 공력을 발휘했던 슈렘프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지 자동차업계는 물론,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