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건 끔찍"..'가정 폭력' 지옥에서 탈출한 엄마들[르포]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6년 지났지만
경찰 신고 가정폭력사건 연간 4만여건
가해자도 피해자도 세대전승 '악순환'
쉼터서 내 일 찾으며 내일 꿈 키워
  • 등록 2024-11-25 오후 2:39:55

    수정 2024-11-25 오후 7:05:33

[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그땐 가정폭력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남편에게) 좋지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꼈습니다.”

25일 서울의 한 가정폭력쉼터에서 만난 윤지영(가명)씨는 1년여 전 상황을 이같이 회상했다.

가랑비에 옷 젖든 스민 가폭…더 무서운 세대전승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직장을 그만뒀다. 천신만고 끝에 아이 둘을 낳았지만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의 기분에 따라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기 일쑤였다. 그녀는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에 온몸으로 감지되는 위험 신호를 애써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그녀를 흉기로 위협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알게 된 이웃의 신고로 그녀는 경찰의 도움을 받게 됐고 긴급여성전화 ‘1366’으로 연락해 아이들과 쉼터에서 생활하게 됐다.

윤지영씨는 “이혼했지만 재산분할이나 양육비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만약 주거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아이들과 생활을 꾸려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정훈 기자)
김정자(73)씨는 30여년 간의 결혼생활을 매 맞는 아내로 살아왔다. 남편이 무서워 이혼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이게 여자의 숙명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맞는 순간에도 누가 알게 되는 게 더 무서워 친구도 친정도 거리를 뒀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주변엔 손내밀어 줄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 8년 전 어느 날 남편의 폭력은 수위가 더 높아졌고 김씨는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아 도망치듯 집을 나와 쉼터를 찾았다.

도움을 받아가며 이혼 절차를 밟았지만 남편은 이혼해주지 않았다. 남편은 함께 살던 집을 김씨와 공동명의로 해두고 그녀를 더 옥죄었다. 그러다 보니 소득이 전혀 없는 그녀는 노령연금, 저소득층 지원 등을 대부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씨는 “옛날로 돌아가는 건 끔찍하다”며 쉼터 인근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모녀지간인 서윤옥(65)씨와 김지혜(31)씨도 쉼터에서 산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서씨는 결혼한 딸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딸도 사위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모녀는 함께 쉼터에서 생활하며 희망을 찾고 있다. 정은선(가명) 쉼터센터장은 “매 맞는 엄마의 딸이 또다시 매 맞는 엄마가 되며 가정폭력의 피해가 세대 전승 되는 사례가 많다”며 “이 고리를 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등촌동 주차장 살인사건 6년 후…줄지 않는 가폭

2018년 10월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서 40대 여성이 살해됐고 범인은 전남편이었다. 가해자는 아내에게 병적인 집착을 보이며 사사건건 간섭하고 일상적으로 아내와 세 딸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온 가족은 보복을 두려워하면서도 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 가까스로 이혼한 후 주거지를 6차례나 옮겼음에도 스토킹이 이어졌고 끝내 충격적인 살인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세 자매는 살인자 아빠를 최고형(사형)에 처해 달라며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렸다. 이후 재판부는 징역 30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20년을 명령했다.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23년 가정폭력 발생건수는 4만 4524건으로 가정폭력 피해자는 4만 3518명이다. 이 중 73.2%가 여성이다. 전문가들은 경찰에 신고되지 않은 사례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여성가족부 ‘가정폭력관련시설 운영실적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피해자는 26만 5094명이었다. 2018년 19만명대였던 것이 해마다 늘어난 것이다. 이 중 18만명이 심리·정서적 지원을 받았다. 정씨와 같이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에서 지원을 받은 이들만 1755명이나 된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어릴 때 가정폭력 피해를 목격하거나 피해 당사자인 경우 (부당한 대우나 직접적인 폭력 등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든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등 위험 감지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라며 “꼭 직접적인 폭행이 아니더라도 위협을 느꼈다면 가정폭력이 맞다”고 지적했다.

가정폭력피해여성 작업장에서 제작된 앞치마와 동전 지갑. (사진=여성가족부)
강서구 사건 이후 달라진 게 있다면 가정폭력가해자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고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면 최대 징역형을 받게 됐다. 또 가정폭력피해자의 개인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열람제한 신청’ 실효성도 높였다. 2차 가해를 차단한 것이다. 실제로 이날 찾은 쉼터는 흔한 간판도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에 입소하면 1년간 아이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과 물품을 지원받는다. 엄마의 양육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돌봄서비스와 함께 아이들에게 서울대 재학생들의 일대일 학습 과외, 언어치료, 작업치료 지원 등도 가능하다.

엄마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과 취업지원도 이뤄진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공동작업장이다. 재봉기술을 익힌 여성들이 모여 앞치마, 동전 지갑, 에코백 등을 만들어 기관에 납품하며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위안부 할머니 ‘기림의 날’ 행사 기념품으로 앞치마와 작은 지갑을 주문 제작했다. 만드는 이들도 받은 이들도 큰 울림을 나눴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제한적이다. 쉼터를 찾는 이들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공간이 제한돼 더 많은 이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쉼터에서는 1년간 머물다 주거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주거지원도 2년에서 추가 2년 총 4년을 지원했던 것을 올해부터 2년 더 연장이 가능해 총 6년의 주거지원 혜택이 주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3년간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신규 주거는 늘지 않은 채 기존에 머물던 이들의 기간만 연장돼 현장에선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정 센터장은 “지난해 초에 입소했던 이들이 기한 만료로 쉼터에서 나가야 하는데 주거지원 시설이 비지 않아 갈 곳이 없는 상태”라고 답답해했다. 이에 대해 정부도 대책을 마련 중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으로 임대주택을 매입, 신규 공급하는데 분배 과정에서 너무 많은 수요가 있다 보니 충분히 확보가 안 되는 곳이 있다”며 “앞으로 대도심 중심으로 (주거지를) 좀 더 확보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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