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피해자들에 국가배상 결정

'녹화사업' 피해자들, 국가 상대 3억 손배소
法 "불법 구금과 폭행…9000만원씩 배상하라"
피해자 "나같은 피해자, 다신 발생하지 않길"
  • 등록 2023-11-22 오후 3:14:59

    수정 2023-11-22 오후 7:50:39

[이데일리 김형환 기자] 법원이 전두환 정권 당시 대학생을 강제징집하고 이들에게 고문·협박으로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는 이른바 ‘녹화사업’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을 받고 프락치(신분을 속이고 활동하는 정보원)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 박만규 목사가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선고공판을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재판장 황순현)는 22일 박만규·이종명 목사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3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 선고기일을 열고 피해자들에게 각 900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박 목사 등은 지난해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로부터 1970~1980년대 국군보안사령부의 이른바 ‘녹화사업’의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시위 전력이 있거나 시위에 참가한 학생 등을 체포한 뒤 제적 및 휴학처리하고 강제 입영 조치해 사회로부터 격리했다. 이후 이들에게 고문·협박 등을 통해 운동권 학생 내부에서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같은 사실이 진화위 조사 결과 드러나자 피해자인 박 목사 등은 국가를 상대로 3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진화위의 조사결과를 모두 인정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불법 구금당하고 폭행·협박으로 양심에 따른 사상을 전향할 것을 강요받았다”며 “동료들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정권으로부터) 사찰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원고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볼 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가 측이 주장한 소멸시효 만료 주장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권은 피해자나 법정대리인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이내다. 재판부는 “국가는 이미 과거사정리법을 제정하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회복을 하겠다고 선언했다”며 “진화위의 결정에도 소멸시효를 이유로 배상을 거부하는 것은 국가의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박 목사 등은 법원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 환영을 표하면서도 배상금(각 9000만원) 규모는 아쉽다며 항소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들의 변호인인 최정규 변호사는 이날 선고를 마친 뒤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은 국가가 이제 와서 소멸시효와 관련한 항변을 한 것에 대해 권리남용으로 절대로 인정될 수 없다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며 “다만 법원이 인정한 9000만원이 국가가 이러한 일을 다시는 벌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져줄 만큼의 금액인지, 피해자들의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금액인지 의문을 가지고 항소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박 목사는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이 국가의 불법 행위를 인정해 참으로 다행스럽다”며 “다시는 우리나라에 이같은 피해를 입는 분이 없도록 법원이 내린 엄중한 판결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소회를 전했다.

이번 판결은 지난해 말 진화위의 국가폭력 관련 진상조사 결과 발표 이후 처음으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박 목사 등 외에도 현재 114명이 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달 31일 녹화사업의 피해자로 인정받은 101명에 대한 손해배상소송도 곧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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