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정부가 20년간 고수해 온 `강(强)달러 정책`을 사실상 폐기했다는 평가가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이고 핵심 경제참모들까지 잇달아 중국, 일본, 독일 등 대미(對美) 무역수지 흑자규모가 큰 국가들을 상대로 환율을 조작했다는 공세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피터 나바로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은 31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유로화는 과거 독일 마르크화와 잠재적으로 같다”고 전제한 뒤 독일이 유로화 가치를 평가절하된 상태로 유도함으로써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교역상대국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도 나바로 위원장이 향후 EU와의 무역협상에서 독일을 주요 장애물로 인식하면서 다자간보다는 양자간 무역협상에 집중하는 전략을 쓰기로 했었다. 이와 관련 FT는 트럼프 행정부가 향후 무역협정 협상과정에서 환율문제를 물고 늘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메르켈 총리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척도로 봐도 유로화 가치는 적정수준을 밑돌고 있는 수준이며 지난해 1~11월중 독일은 2740억달러(약 318조원)에 달하는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고 이중 대미 무역흑자는 600억달러에 이른다.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 주요 인사들의 잇단 강달러 경계 발언에 시장 전문가들은 지난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행정부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로이드 벤슨의 약달러 정책을 “건전하지 못한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단번에 강달러 정책으로 돌아선 로버트 루빈 당시 재무장관의 선언이 사실상 끝을 본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닐 존스 미즈호증권 헤지펀드 FX세일즈 대표는 “우리는 사실상 강달러 정책이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최근 미국은 중국에 대해 달러 강세를 우려했고 이제는 유로존 국가들까지 겨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덕인지 주요 교역상대국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올 1월에 2.6%나 추락했고 이달 들어서도 0.85% 더 떨어졌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 스트래티저스 리서치 파트너스의 돈 리스밀러와 에리카 핼리 콤프 이코노미스트는 과거사에 빗대 “지난 1971년 재무장관이던 존 코널리가 언급했던 ‘달러화는 우리 돈이지만 당신들의 문제(The dollar is our currency, but your problem)’라는 발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묘사했다. 그해 8월1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이라는 조치를 발표했는데 금과 달러 교환을 중단하고 모든 수입품에 10% 관세(=수입과징금)를 매기는 것이 골자였다. 이후 파장은 엄청났다. 달러대비 엔화 가치가 7% 급등했고 여기에 10% 관세까지 더해져 미국으로 수출되는 일본제품 가격은 삽시간에 17%나 뛰었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도 1971년 3분기에 전년동기대비 11.3%였던 경제성장률이 그 해 4분기엔 6%로 반토막 났다. 또한 브렌트우즈 체제가 최종적으로 무너진 1973년 이후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국제유가를 4배나 높였고 이후 오일쇼크라는 결과까지 초래하고 말았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정책들은 당시와 꼭 닮은 데자뷰다. 닉슨과 같은 암울한 결과를 낳지 않기 위해서라도 트럼프 당선인은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정책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자국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려고 경쟁하는 환율전쟁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 결과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