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봉투 안에는 카드부실 해결을 위한 브리지론 가운데 은행이 부담해야할 3조8000억원의 은행별 할당액이 적혀 있었다. 항의하는 일부 은행장들에게 김 국장은 "당신 때문에 나라 망하면 책임 질거냐"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2010년 1월3일 금융위원장으로 명패를 바꾼 김석동 대책반장은 이번엔 금융지주사 회장들을 만났다. 부실 저축은행 문제를 은행들이 해결해 달라는 게 김 위원장이 전달한 메시지였다. 요청의 형식을 띄긴 했지만 금융지주사 회장들에게는 각자 인수할 저축은행 이름이 담긴 노란 봉투처럼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저축은행 부실 문제를 은행들이 해결하라는 김 위원장의 메시지는 은행들 입장에서 보면 카드사태 이후 8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악몽의 데자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금융위원장으로 발탁된 대책반장 김석동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위원회의 존재감만으로도 시장의 질서와 기강이 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신임 위원장의 출사표에 은행들이 확실히 긴장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대규모 부실 대출을 떠안고 있는 저축은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부동산 경기가 풀려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꿈같은 상황을 제외하면 딱 한가지 뿐이다. 부실 대출을 못받을 돈으로 포기하고 그로 인해 생긴 손실을 새로운 자금을 투입해 메우는 것이다.
그러나 대주주 증자나 후순위채 발행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선뜻 인수하겠다는 투자자들도 없다. 남은 방법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정리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어딘가에서 돈을 끌어오느냐다. 부실한 저축은행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실규모가 커질 수 밖에 없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선택한 방법은 후자다. 은행들에게 저축은행들을 인수하라고 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금융지주사 회장들은 김석동 위원장을 만난지 48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저축은행들을 인수하겠다고 앞다퉈 발표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김석동 위원장이 금융지주사 회장들에 대한 군기잡기에 성공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은 그동안 저축은행 인수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해온 게 사실이다. 진동수 전임 금융위원장 역시 "은행들은 평판 리스크 때문에 서민금융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하곤 했다.
저축은행 부실이 표면화 되면서 은행들은 더욱 몸을 사렸다. 내부적으로는 관심이 있기도 한 눈치였지만 자칫 부실 저축은행을 강제로 떠안게 될까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축은행 인수는 고려한 바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저축은행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만 보면 은행들이 직접 인수하는 것만큼 깔끔한 해결책은 없다는 게 금융권의 평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은행권의 반발이나 부실 전이를 어떻게 차단하느냐는 것.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들도 소액주주들이 있는데 비싼 값에 함부로 사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로 고민의 일단을 전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한 대형 저축은행들은 인수자 쪽에서 돈을 내고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넣어야 가능한 상황이다. 인수하는 것 자체가 손실이 되는 저축은행은 손실액만큼 공적자금에서 은행에 보전해 주는 게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손실액을 추정하는 실사 작업을 얼마나 정확하게 할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그러나 `노란 봉투`를 받아든 금융지주사들이 과연 깐깐한 실사를 통해 공적자금을 더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장 실패를 막기 위한 관치의 불가피성과 관치의 부작용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충돌한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5일 기자들과 만나 "취임 후 주요 금융권 인사들과 만나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시스템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 은행들이 저축은행을 인수하는 게 필요하다는 자연스런 공감대를 이뤘다"면서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이 저축은행 인수 의사를 나타냈고 이를 전적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