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열정·야망·꿈’ 한국 패션계 수장 이상봉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지난 1985년 브랜드를 론칭하고 외환 위기 당시 프랑스 진출을 시작으로 글로벌 패션계에 눈도장을 찍은 그에게는 최단 기간 성공한 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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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만난 이상봉 디자이너는 “1년에 16번, 한 달에 4번 쇼를 한 적도 있었다. 아마 국내 디자이너 중 가장 많은 쇼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쇼를 준비할 때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피하며 오직 작업에만 몰두했다. 식사 공간은 작업실 반경 100m 이상을 넘겨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바쁜 일정에 시간에 쫓겨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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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리에 사군자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파리 스텝들이 ‘왜 일본 것을 가져오냐’고 묻더라”며 “그때 문화 선점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가 ‘한 번 끝난 아이템은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행보를 꾸준히 이어간 이유다.
철저한 인생을 살아온 이상봉에게는 늘 뚜렷한 계획이 있었다. 35세에 브랜드를 시작하고 45세에 세계 무대에 도전하는 등 구체적 목표를 설정하고 인생을 설계해온 그였다. 이상봉 개인 자격으로 쌓은 글로벌 인지도는 K-패션의 세계화를 이끈 동력이 됐다. 다만 그랬던 그도 코로나19는 피할 수 없었다. 2019년 11월 중국 쇼를 마지막으로 그는 해외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상봉은 자신을 저항정신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경기도 고양시와 함께 ‘괜찮아 It’s OK’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직접 디자인한 로고가 들어간 티셔츠와 마스크를 나누며 사람들을 응원했다.
그는 “아티스트는 움직여야만 하지 가만히 있으면 미친다는 생각이 컸다”며 “모델, 포토그래퍼, 영상, 메이크업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힘을 합쳐 재능 기부에 나섰다”고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할 일을 찾았던 그는 국민 디자이너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자신에게 몰입하고 쏟았던 시선을 사회와 세상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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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중앙 콘테스트 출신이었던 만큼 패션 디자이너와 모델을 꿈꾸는 아이들이 꿈을 꾸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시작한 일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 중인 콘테스트는 이상봉의 뜻에 공감하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의 손길이 모여 올해로 벌써 7회차를 앞두고 있다. 그는 자기 능력보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행운을 돌려주기 위해 시작한 일들이 결국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실천하는 길이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부터는 ‘다문화 꿈토링 학교’ 교장을 맡아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아이들의 꿈을 디자인했다. 꿈토링 학교에서는 서울시교육청 관내 초등학교 5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문화 학생들을 대상으로 패션 디자인과 모델 교육을 실시한다. 그는 “지금 맡은 일을 은퇴 후로 미뤄두는 건 스스로에게 비겁한 일이라 생각했어요. 조금이라도 내가 능력이 있을 때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고 흔쾌히 모든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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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의 나이는 여전히 37세에 멈춰 있다. 다만 이 시간은 결코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그는 37세에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지만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과감히 나이를 버렸다. 스스로가 못났다고 남을 부러워하기보다 자신을 잃지 않는 대신 더 열심히 노력하자고 다짐했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행운들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게 됐다.
그의 목표는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세계 무대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던 청년 이상봉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뤄나가는 것이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패션을 하며 가장 많이 쓴 단어가 도전과 열정이었어요. 요즘 가장 사랑하는 단어는 꿈이에요. 나 자신에 대한 꿈과 아이들의 꿈을 응원하면서 계속 도전해 나갈 생각이에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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