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알프레도와 토토가 알려준 소통

류한수 상명대 교수(유럽현대사 전공)
  • 등록 2016-09-19 오후 2:48:05

    수정 2016-09-19 오후 2:48:05

[류한수 상명대 교수] 한때에는 나이가 권력이고 권위였다. 고대 그리스의 한 서사시에 이런 장면이 있다. 중대사를 논하는 회의에서 한 노인이 “나는 벌판에서 산이 솟는 것도 산이 가라앉는 것도 볼만큼 오래 살았소”라고 말한 뒤 자기 의견을 밝힌다. 신이 아닌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년을 넘기기 어려운 한낱 인간이 들이 산이 되고 산이 들이 되는 지질학적 변화를 볼 수는 없으니, 그 노인은 나이 가지고 허세를 떨어 젊은이들의 기를 꺾은 셈이다.

오늘날과 달리 사람이 살면서 겪는 변화가 기껏해야 계절이 바뀌는 것밖에 없던 시절에는 연륜에서 우러난 지식과 경험이 문제를 푸는 슬기의 원천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했고, 그런 이의 눈에 늘 어설퍼 보이는 나이 적은 것들은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대상이었다.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라는 구절에 나타나듯, 우리 옛말에서 “어리다”는 곧 “어리석다”였다. 현대어에서 의젓하고 진중하다는 뜻을 지닌 낱말 “점잖다”의 어원은 “젊지 않다”이다.

그러나 근대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세월이 흘러도 바뀌는 것 없이 모든 게 그저 되풀이될 따름이던 근대 이전에야 나이에서 얻은 경험이 중요했지만, “견실했던 모든 것들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근대에는 그런 경험이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한다. 빠른 변화의 시대일수록 중요해지는 호기심과 적응 능력은 오래 산 이들로서는 점점 더 갖추기 힘들어지는 덕성이다. 나이 들며 얻은 경험은 거추장스러운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진화와 역사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수십만 년 동안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요인은 소통과 교육을 통해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전달되는 나이든 이들의 슬기와 연륜이었다. 이런 지식과 경험의 전승은 사실 유전자상으로는 거의 같은 침팬지와 인간을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든 요인이었다. 따라서 가르치는 늙은이와 배우는 젊은이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그 비중과 성격이 달라질 따름이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끊어지진 않을 것이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의 관계는 시대에 맞춰 재설정되면서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흔히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는 1988년에 나온 이탈리아 영화 <누오보 시네마 파라디소>이다. 정확한 번역은 <새 천국영화관>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시네마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한 읍에 있는 영화관을 회고하며 옛 향수를 자극하는 이 영화에 공감하며 웃고 눈물지었던 청춘들이 지금은 중장년이 되어 있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두 주인공인 늙은 상영기사 알프레도와 영화에 푹 빠진 꼬맹이 토토는 인연을 이어간다.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상영기 돌리는 법을 가르쳐주니 둘은 스승과 제자이겠지만, 초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장에서 알프레도가 답을 보여달라고 토토에게 애원하는 장면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둘은 친구이다. 살 날이 산 날보다 적은 알프레도와 10대 소년 토토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은 다름 아닌 우정이다.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큰 세상으로 나아가 꿈을 펼치라면서 귀향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말라고 귓속말로 속삭인 뒤 단호히 토토의 등을 떠밀어 로마행 기차에 태우는 장면은 언제나 가슴 찡하다.

알프레도와 토토의 관계야말로 오늘날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가 맺어야 할 관계의 모범이 아닐까 싶다. 알프레도는 자기에게 낯익은 세계와 가치관을 억지로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토토와 소통하면서 토토가 새로운 세계와 가치관을 찾아 나설 굳은 용기를 품도록 다독였다. 토토는 알프레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현했다. 현대의 세대 관계는 이러해야 하지 않을는지… 다가온 한가위에 앞세대와 뒷세대가 한데 모일 텐데, <시네마 천국>을 같이 보며 세대 간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진다면 소통이 원활해지지 않을까 싶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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