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적 성 역할 지속가능하지 않아”
프레드릭 라인펠트 스웨덴 전 총리는 19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인구위기…새로운 상상력,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제로 열린 제15회 이데일리 전략포럼 기조연사로 나서 “초저출산율에 처한 한국에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남성과 여성, 젠더 이슈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며 남녀 간 전통적 성 역할 타파와 일·가정의 양립 등 문제부터 들여다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남성은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양육을 하는 전통적인 성 역할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남성과 여성 각각 경제적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누가 누구를 부양하는 것이 아닌 모두 동일하게 일하고 양육하는 것이 균형 재조정의 첫 번째”라고 강조했다.
스웨덴 역시 한때 한국과 같이 저출산율로 고민이 깊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현재 1.5명의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출산율은 단 0.7명으로 전 세계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출퇴근 시간 유연화도 라인펠트 전 총리가 공을 들인 정책이다. 그는 “일을 제대로 하는지는 둘째치고 일단 직장에서 버티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게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며 “오전 8시 출근해 오후 5시 정시 퇴근하고 상황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거나 재택근무를 확대하는 등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총리실부터 솔선수범했다”고 설명했다.
라인펠트 전 총리는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문화가 정착되면 여성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좋은 엄마를 할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된다”며 “아침에는 아빠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오후엔 엄마가 하원하는 등 조정이 가능해지고 아빠와 엄마 간 육아와 집안일을 나눠 할 수 있는 환경이 일과 가정의 양립으로 갈 수 있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균형 잡힌 성 역할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이롭다고 했다. 라인펠트 전 총리는 “대학에 진학하고 높은 학점을 받은 여성 인재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회의 미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반면 엄마, 선생님, 돌봄 등 여성 중심의 양육 구조는 남성 롤모델을 필요로 하는 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전통적으로 ‘법률혼’만을 결혼으로 인정하는 한국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한국은 굉장히 엄격한 법률혼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프랑스처럼 등록동거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인식과 가치 변화가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등록동거혼이란 동거하는 남녀에게도 가족 지위를 인정해 법적,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제도다. 프랑스는 지난 1999년 비혼(非婚) 동거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팍스’(PACS·시민연대계약) 제정 이후 2022년 출산율이 1.8명으로 올라섰다. 2020년 기준 비혼 출산율은 프랑스 62.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41.9%로 한국은 단 2.5% 수준에 머물렀다.
나 의원은 “우리는 전통적으로 법률혼이 강하게 지배하면서 혼인하는 것이 장벽이 높고 가정과 가정이 결합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갖추고 결혼해야 하니까 초산 연령이 높아지고 둘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비혼을 장려하는 게 아니라 지금 현실을 좀 더 반영할 수 있는 제도이지 않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저출산 정책의 대응이 늦어진 점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최근 국민의힘에서 발의한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 법안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나 의원은 “한국은 1982년에 출산율 2.2명을 찍었는데 이때 인구정책의 방향을 어떻게 전환할지 고민하지 않고 1990년대 후반까지 산아제한을 계속해온 것이 지금의 초저출산 현상을 빚게 된 계기”라며 “지금이나마 저출산 부총리 제도를 신설한다고 하는데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담론을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