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는 신탁 계정 환매 요청에 대응해 환매조건부채권(RP)를 발행하고 이 RP를 은행이 매입하면서 자금 숨통이 트였지만 연말까지 20조원 이상의 PF-ABCP(프로젝트 파이낸싱 자산유동화증권) 만기가 도래해 더 큰 파고를 넘어야 한다. 차환 조달이 수월하지 않을 경우 증권사의 유동성 리스크는 한층 더 커질 전망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은행의 여유 자금을 비은행으로 돌리는 방안이 정책 과제 중 하나”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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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난달 말 은행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예대율 규제를 풀면서 은행채·양도성 예금증서(CD)가 자금 블랙홀이 되는 것은 완화했다. 다만 고금리 매력에 자금은 정기 예·적금으로 향하고 있다. 올 들어 정기 예·적금으로만 250조원 가까이 몰렸다. 10월엔 정기예금으로 56조2000억원이 유입돼 역대 최대치를 찍었다. 이달에도 11일까지 5조원 이상 유입됐다.
은행 자금은 이달 3일 한은이 7일물·연 3% 금리로 20조원 규모로 발행한 RP에 420조원이 몰렸다. 일주일 전 250조원에 이어, RP확보를 위한 과잉 응찰로 역대 최대액이 몰렸다. 지난 10일에도 15조원 모집에 48조원이 응찰했다. 은행이 상대적으로 자금에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다.
반면 증권사는 △급격한 금리 인상 △PF-ABCP 부실 우려 △신탁자금 순유출 △연말 자금 확보 수요 등으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KB증권에 따르면 증권사는 신탁 자금 환매 대응을 위해 신탁 계정에서 RP발행을 연초 대비 8조원 넘게 늘렸다. 금융시장 관계자는 “기업어음(CP) 시장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증권사들이 RP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RP조달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사가 발행한 RP는 은행, 은행 신탁계정에서 매입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은이 지난달 말 증권사를 상대로 직접 RP를 매입하겠다고 밝히자, 은행들은 여윳돈을 증권사 1일물 RP 매입에 사용하는 등 증권사에 대한 자금 공급을 늘리고 있다. 이에 이달 초 1일물 RP금리는 기준금리보다 낮은 3% 밑으로 빠지다가, 다음 주 금융통화위원회 금리 인상 결정을 앞두고 3.2% 수준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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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정부 대책으로 은행의 ‘자금 블랙홀’ 현상이 완화됐지만, 연말까지 아직 더 큰 파고가 남아 있다. PF ABCP 잔액은 10월말 35조6000억원인데, △11월 16조9000억원 △12월 4조9000억원이 만기 도래한다. 한은에 따르면 증권사의 PF 채무보증 규모는 6월말 24조9000억원으로 PF대출 유동화증권(39조8000억원)의 상당 부분이 증권사와 연계돼 있다. 차환발행이 제대로 안 될 경우 증권사는 PF우발채무 인수 부담을 떠안아야 하고 PF대출 부실 우려도 커질 수 있다.
PF-ABCP 매입 대책이 시행되면 연말까지 무난하게 넘어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한광열 NH투자증권 크레딧팀장은 “산은에서 PF-ABCP를 매입하겠다고 밝히는 등 정책이 강하게 나와서 아직 효과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점차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PF-ABCP 매입 지원시 옥석 가리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지만, PF-ABCP 대부분이 사업 초기 단계인 브릿지론 형태이기 때문에 옥석을 가리기 쉽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대형 증권사에선 “중소형 증권사들의 PF-ABCP를 왜 우리가 떠안아야 하느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어 PF-ABCP매입이 제대로 실행될 지는 미지수다. 이에 은행 여유자금을 증권사 등으로 순환시켜야 한다는 당국의 메시지가 나온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11일 한은-한국경제학회 국제컨퍼런스 개회사에서 “은행 예금 금리가 빠르게 올라 비은행 부문에서 은행 부문으로 자금 이동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며 “고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의 긴축 하에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이러한 자금 흐름을 비은행 부문으로 어떻게 환류시킬 것인가는 한은이 당면한 또 하나의 정책적 이슈”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상만 하나금융투자 크레딧 파트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정부 대책으로 유동성 경색이 완화된다고 해도 부동산 PF와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며 “관련 익스포저(위험노출액)를 키워 온 금융사들이 정책 지원을 통해 유동성 대응을 하면서 시간을 두고 손실처리 및 자본확충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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