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닷컴 제공] 배추는 다섯 번 죽는다고 한다. 먼저 밭에서 뽑힐 때 한 번 죽는다. 그 다음에 칼로 배를 가를 때 또 죽음을 맛본다. 할복한 배추가 소금을 뒤집어쓰고 절여지는 것이 세 번째 사망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절여진 다음에도 온 몸에 양념을 바른 채 따가운 고통을 겪어야 하니 네 번째 죽음이요, 독에 담겨져 땅에 묻히니 다섯 번째 죽음이다. 이른바 ‘배추 오사론(五死論)’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원래는 <인생김치 이야기>(심동철·나침반)라는 책에 처음 소개됐다.
배추는 다섯 번이나 죽은 뒤에야 비로소 김치로 부활한다. 인생도 제맛을 내려면 여러 번 죽어야 한다. 덜 된 사람들을 보면 대개 숨이 덜 죽은 배추처럼 뻣뻣하다. 인생의 매운 맛을 겪지 못한 사람들은 덜 여문 배추처럼 어딘지 무르다. 야무진 배추로 제대로 담가야 김치도 야문 맛이 난다.
음식점에서 중국산 배추로 담근 김치가 나오면 시큰둥해하기 일쑤다.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추는 원래 중국에서 처음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백 가지 야채가 배추만 못하다(百菜不如白菜)”는 말이 내려온다. 그만큼 배추는 예부터 귀한 채소로 여겨져 왔다. 배추는 한자로 백채(白菜)·숭채(崧菜)·황아채(黃牙菜) 등으로 표기하는데, 우리나라 문헌에는 고려 고종 23년(1236)에 출판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숭(崧)이라는 문자로 처음 등장한다. 당시 배추는 식용보다 약초로 쓰였다. 오늘날 김치를 담그는 결구형 배추는 1770년쯤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배추 종자는 같지만 자란 풍토가 다르니 김치맛도 토종과 중국산이 각기 다르다.
옛날의 식품보관법은 말리고, 절이고, 발효시키는 것이었다. 발효식품인 김치에는 배추를 오래 보관하려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 수분이 많은 배추는 오늘날에도 장기간 저장하기 힘들다. 수급이 불균형해지면 값이 널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즘 배추가 ‘백 가지 야채’는 물론 소고기보다도 귀하다. 엊그제 대형 마트에서 배추 한 포기 값이 1만3800원이었다고 한다. 재래시장에서는 무려 1만5000원까지 치솟았다는 소식이다. 배추는 다섯 번 죽어야 김치가 된다지만, 김치를 한 번 담그려면 서민들은 다 죽을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