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지도부 사퇴 후 비상대책위원회로 꾸려진 집행위원회 회의. 한 의원의 손에는 "수습을 당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수습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내부 공감대 형성 및 정국운영 모멘텀 확보에 주력"이라는 내용의 회의 자료가 쥐어져 있었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정세균 임시 당의장의 모두 발언에도 내분 수습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정 의장은 "어떤 집단이든 내부적인 입장차이가 있지만, 견해차가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마땅히 견제해야 한다"며 정동영(DY)·김근태(GT) 양 계파를 향해 자제를 당부했다.
당내에서는 정세균 의장이 단지 '조기전당대회 준비위' 수준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 중진 의원은 "무난하게 전당대회로만 가는 체제가 된다면 '제2의 문희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그릇(당)을 지키기 위해서는 칼을 휘두를 땐 휘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재 정 의장에겐 막강한 권한이 주어져 있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중앙위원회의 권한도 위임받았다. 또한 지난 주말에 열린 '12인 회의'에서는 "당 쇄신이 필요하면 추진하라"며 청와대가 정 의장에게 '뒷심'을 실어줬다.
정 의장은 일단 각 지역별, 선수별 간담회를 통해 의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시도당 순회 방문을 통해 당원들 의견도 수렴하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필요하다면 토론회를 통해 당 쇄신안을 공론에 부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대통령과 정면대결? 글쎄....
당이 이처럼 '수습' 분위기로 전환한 배경에는 정동영·김근태 두 차기주자의 딜레마도 작용했다. 판은 벌어졌으나 마땅한 돌파구가 없다는 점이다. 되려 '노무현 때리기'의 역풍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다.
지난 28일 연석회의는 마치 '노무현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 훨씬 거친 표현들이 나왔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한 주요당직자는 "문희상 의장을 대신해 의원들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작정이었으나 바로 노 대통령에 대한 공격부터 나오더라, 내가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고 귀띔했다.
이날 사태를 유시민 의원은 "작은 탄핵"이라 명명했고, 이는 친노 그룹의 결집을 자극했다. 친노 성향의 의원들은 "위기의 원인을 대통령 탓으로 돌려 돌파구를 찾으려는 정치공학적 수"라고 청와대 책임론을 들고나선 의원들을 비난했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며 '역풍'을 경고하기도 했다.
한 여론조사전문가는 차기 대권주자들이 대통령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기엔 명분도, 대안도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친인척이나 측근 비리로 대통령의 도덕성에 문제가 생겼다면 몰라도 지금은 '지지율 떨어졌으니 나가라'고 하는 꼴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에서조차 재선거 결과에 대해 청와대 책임론까지 일어나는 것은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한 주요당직자는 "재선거로 울어야 되는 건 한나라당"이라며 "대구에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가 44%가 득표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명분도 약하지만 대안도 불확실하다. 특히 김근태 장관 측에서는 당 정체성 문제를 앞세워 '양극화 해소'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동반 성장' 프로그램이 가동 중인 상황에서 큰 틀의 차이는 별반 없어 보인다.
또한 역풍을 경고하는 측에선 막말로 "노무현을 배신해 성공한 사례가 없다"고 일축한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의 색깔 공세를 받았지만 노 후보의 지지율은 올라갔고, 정몽준 후보의 배신은 대선 승리의 결정타였다. 야당의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인한 총선 승리는 역풍의 대표적인 사례다.
친GT 성향이면서도 '청와대 책임론'에 동조하지 않은 한 재선 의원은 "그 흐름이 왜소하게 보인다"며 고민을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동영·김근태 장관은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다.
장관직 유지를 '불공정 게임'이라고 보는 김 장관 쪽이 더 다급하다.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소속 의원들은 "빅 매치를 통해 당의 활력을 되찾자"며 내년 전당대회 출마를 김 장관에게 강권하려는 움직임이다.
반면 '노(盧)심'도 살피고 '당(黨)심'도 봐야 하는 정동영 장관은 쉽게 엉덩이를 뗄 상황이 아니다. 바른정치모임의 민병두 의원은 "질서 있는 전환"을 주장하며 "지금 노 대통령과의 끈을 놓으면 개혁세력 전체에게 재앙이 올 수 있다"고 역풍을 우려했다.
시나리오는 3가지다. 내년 초 예정된 전당대회에 두 주자가 나서 정면으로 맞붙는 상황.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하는 입장의 양측으로선 다급한 마음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같은 정면충돌은 바라지 않는다. 복귀한 두 장관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지방선거를 치르는 '백의종군' 방식을 바란다. 정 안되면 순차 복귀하는 절충안도 고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앞으로 남은 정기국회 두 달.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비롯해 부동산 후속입법안, 국방개혁안 등 만만치 않은 입법안을 가지고 대야협상에 나서야 하지만, 동시에 두 차기주자들을 단속해야 하는 이중고에 처해 있다.
앞서 언급한 한 중진 의원은 노 대통령의 탈당 가능성과 관련 "두달 동안 유보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며 정기국회를 거치면서 '노심'이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각종 정책, 입법 등 남은 국정과제를 해결하고 차후 정치적 기능을 해나갈 수 있는 당 구조를 갖추느냐에 따라 노 대통령의 '다음 수'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노 대통령이 차기 주자들의 복귀와 관련 "당사자들이 결정할 일"이라 말하고 "당이 정치의 중심이 되야 한다"며 한 발짝 물러난 듯하지만, 실상은 차기주자들이 아니라 노 대통령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