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발해 매출 2조원이 넘는 국내 대표 식품 회사를 일궈낸 율촌(栗村) 신춘호 농심 회장의 유지(遺旨)다. 향년 92세로 지난 27일 새벽 영면에 든 신 회장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50여 년간 강조한 품질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경제개발 시절 당시 배고팠던 한국인의 먹을거리를 걱정했고, ‘이농심행 무불성사’(以農心行 無不成事·농부의 마음으로 행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라며 음식문화를 이끌어온 고인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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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회장은 1930년 울산에서 5남 5녀 중 다섯째이자 삼남으로 태어났다. 큰형은 롯데그룹을 창업한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다. 신 회장은 1958년 대학 졸업 후 신 명예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하다가 1963년부터 독자적인 라면 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면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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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면, 새우깡 등 세대를 뛰어넘는 인기 제품의 이름도 신 회장이 직접 지었다. 새우깡은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어 기발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너구리(1982년),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1983년),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1984년), 신라면(1986년) 등 히트작을 연거푸 내놓는다.
이 중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신라면’이란 작명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신 회장은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 그는 “내 성(姓)을 이용해 라면 팔아보자는 게 아니다.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신(辛)’으로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탄생한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 라면으로 등극했다. 창업 6년 만인 1971년 라면을 처음 수출을 시작한 농심이 1990년대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도 했다. 지금은 세계 100여 개국에 농심이 만든 라면을 공급하고 있다. 농심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9억9000만달러(약 1조1000억원) 해외매출을 기록했다.
신 회장은 고령에도 트렌드를 읽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2010년 조회사에 나타나 작심한 듯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이듬해인 2011년 프리미엄라면 ‘신라면블랙’을 출시했다.
고급화는 신 회장의 오랜 지론이기도 하다.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하고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즈는 신라면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다. 스스로 ‘라면쟁이’라 부르며 장인정신을 보여온 그의 집념이 이뤄낸 결실이다.
신 회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농심은 앞으로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임종을 앞두고 신 회장은 “현재 진행 중인 미국 제2 공장과 중국 청도 신공장 설립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해 가동을 시작하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