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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탁 탁 탁.” 지난 19일 오후 6시 서울 명동 명동예술극장 앞.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로 땅을 치며 자선냄비 쪽으로 다가왔다. 구세군의 종소리를 좇아 몸을 옮긴 것이다. 노인은 부축을 받아 빨간 냄비에 돈을 넣었다. “아이고, 뭘.” 인터뷰를 시도하자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생색낼 줄 모르는 순수한 마음이다. 영하 4.5도, 바람이 매서워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를 밑돌았던 쌀쌀한 날씨. 해 질 녘 어둠 속에 붉은 냄비가 따뜻해 보였다.
350여개의 ‘붉은사랑’이 세밑을 데우고 있다. 전국 76개 지역에 놓인 자선냄비다. 1928년 시작돼 85년 동안 이어진 나눔의 손길. 자선냄비는 올해 더욱 끓고 있다. 1억원짜리 수표를 쾌척하거나 6800만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을 자선냄비에 넣은 얼굴없는 천사들의 손길 덕분이다. 명동에서 첫 거리모금을 시작했을 때 모인 돈은 848원 67전. 올해 거리모금 목표액은 55억원으로 늘었다. 자선냄비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서울 명동 일대 네 곳의 종을 울리고 있는 구세군 사관학생 9명의 하루를 따라가 봤다.
△ 12:00
“땡 땡 땡.” 자선모금 시작이다. “한 분 한 분의 사랑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큰 힘을 전하고 있다.” 종이 울린 지 약 5분. 우리은행 앞 자선냄비에 중년 여성이 자선의 물꼬를 텄다. 김은숙(54) 씨는 “저 종소리가 이리로 오라는 소리로 들리더라”고 수줍게 말했다. 오후 1시까지 22명이 자선냄비에 정을 기울였다. 1시부터 2시까지는 28명이 다녀갔다.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오후 1시 35분에 자선냄비에 돈을 넣은 중국인 쉐리 시아오(40) 씨는 “자선냄비를 처음 봤다”며 신기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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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날이 장날. 눈이 내렸다. 낭만은 사치다. 탈모로 마음고생하는 기자다. 눈의 공격이 마음까지 얼어붙게 하려던 순간. 최수진(29) 사관학생이 “눈이 오면 성금이 더 잘 된다”며 웃었다. 자선의 손길은 다양했다. “환갑을 맞았다. 기쁘게 써 달라.” 세월이 쌓인 귀걸이, 반지 등 장신구를 하얀 봉투에 담아 자선냄비에 넣은 이도 나왔다. 행인에게 받은 돈을 다시 기부한 노숙자도 있었다. 박성혁(34) 사관학생은 “초등학생이 ‘1년 동안 모은 용돈입니다’라고 적어 돼지저금통을 놓고 간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자선냄비의 단골손님은 어른이 아닌 ‘꼬마 천사’들이다.
△18:00
자선냄비를 우리은행 앞에서 명동극장 앞으로 옮겼다. 장사를 하러 나온 노점상들이 쏟아져 설 자리가 없어서다. 자선냄비가 늘 환대받는 건 아니다. 인근 노점상 주인이 자선냄비로 다가와 사관학생에 인사를 하더니 스피커를 옆으로 돌려놨다. 마이크 소리를 피하고 싶다는 뜻이다. 모진 말을 듣기도 한다. 양수정(39) 사관학생은 “지나가면서 ‘너희가 거지야? 길에서 이런 걸 걷고 그래’라는 분이 있어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20:00
모금이 끝났다. 사관학생들은 자선냄비를 챙겨 경기 과천에 있는 학교(기숙)에 돌아갔다. 오후 9시. 강남·압구정역 등에서 모금 활동을 벌인 자선냄비가 속속 도착하자 돈을 빨간색 가방에 털어 넣었다. 규칙이 있다. 사관학생들은 돈을 세지 않는다. 자선냄비 자물쇠도 모두 모인 상황에서만 연다. 가방에 담긴 돈을 당직 사관학생 둘이 차에 실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광화문우체국이 입금처. 다음날 오전 구세군 본부 직원 및 자원봉사자들이 성금을 센다. “내가 죽고 나면 집을 기부하고 싶다.” 집 임대차계약서가 기부품으로 나왔다. 전국에서 이날 모인 성금은 1억 3381만 5830원. 2일 거리모금을 시작해 18일 동안 약 38억원이 쌓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 33억원이 모인 것과 비교하면 5억원이 늘어난 금액. 사람이 희망이다. 5만여 자원봉사자와 함께 마음으로 달구는 자선냄비 거리모금은 31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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