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외로움을 타다 보니 개를 길렀고, 이를 계기로 생긴 개에 대한 관심은 평생을 갔다. 영화에 심취해 3년간 영화 1200편 이상을 본 걸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고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 들어갔으며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당시 스포츠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지내는 등 아마추어 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는 영광도 누렸다.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고,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미국 유학 중에는 자동차에 심취했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이 됐다. 자동차에 대한 애착은 훗날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 배경이 됐다.
1966년 이 회장은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를 만나 맞선을 봤다. 1967년 1월 약혼을 하고 홍 여사가 대학을 졸업한 후인 그해 4월 결혼했다.
호암이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이 회장은 우여곡절 끝에 삼성 후계자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78년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87년 12월 1일 제2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회장은 삼성 혁신에 나섰다. 회장 취임 5년차인 1993년은 삼성 역사에 가장 중요한 해로 기록됐다. 미국의 한 가전매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삼성 제품에 충격을 받은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들을 소집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신경영 선언’이었다. 이 회장은 늘 ‘양보다 질’ ‘불량은 암’ 등의 말로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1995년 3월 운동장에 삼성 휴대폰 등 15만점을 모아 ‘화형식’을 한 것은 그가 품질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이 회장의 생애는 말년에 들어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5년에는 막내딸을 떠나 보냈다. 사법 리스크도 이어졌다.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유죄를 받아 2009년 8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확정됐다. 다만 유죄 확정 4개월 만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단독 사면을 받고, 3개월 뒤인 2010년 3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삼성 특검의 파장이 지나고 난 뒤에는 삼성가 형제간의 상속 소송이 발생해 이 회장의 심신이 크게 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져 입원 생활을 해오다 6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과 삼성전자 회장 외에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1981년),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1982∼199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8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1993∼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1996년) 대한레슬링협회 명예회장(1997년), 한국장애인복지체육회 회장(1998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특별고문(2002년), KOC 이사(2009년) 등을 지내며 경제계, 체육계 등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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