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 주차장에선 세계적인 명차중에서도 고급차로 꼽히는 벤츠의 마이바흐가 국산 준중형 승용차인 아반떼에게 문짝이 찍히는 일이 벌어져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마이바흐가 대당 7억원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워낙 비싼 차이다보니 주목을 받기에는 충분한 해프닝이었죠. 그런데 이 차의 주인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죠.
아반떼가 마이바흐 문짝을 찍었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네티즌들 사이에선 아반테 운전자가 거액의 수리비를 물게될지, 동정론도 적지 않게 일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삼성쪽에서 보상비는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자동차 마니아로 유명합니다. 그는 주로 `마이바흐62`를 즐겨 타며 벤츠의 최고급 차종인 S클래스를 자주 이용합니다. 지난 5월 고려대 명예박사 수여식 땐 연두색 아우디 승용차를 타고와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마니아 수준을 뛰어 넘고, 그의 자동차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다는 얘기는 사실 오래 전부터 나왔습니다.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현 르노삼성차)에 뛰어들었다가 그만둔 것도 이 회장의 자동차사업에 대한 애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엔 안기부 불법도청 녹취록, 소위 X파일을 통해 삼성그룹이 신한국당에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해 기아차를 인수하려했다는 추측까지 불거지고 있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이 역시 이건희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애착 내지 욕심과 관련이 있겠죠.
기아차가 부도에 내몰려 97년 7월 부도유예협약의 나락으로 떨어진지 한달이 갓 지난 그 해 8월엔 동아일보가 삼성 비서실이 작성했다는 소위 `신수종 보고서`를 인용해 "삼성이 기아인수 작전을 3월부터 극비로 추진했다"는 기사를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싣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가 삼성그룹 비서실이 97년 3월에 작성했다고 보도한 `보고신수종사업 추진현황 및 향후계획`에는 `기아자동차 인수 분위기 및 여론을 점차 조성하고, 이를 위해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에 대한 정책건의를 강화하고 정부와의 공고한 공조체제를 구축해나갈 계획`이란 언급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기아차는 삼성캐피탈 등 삼성 계열사들의 급작스런 자금회수로 인해 자금난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무너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옛 기아차 경영진들이 삼성 때문에 회사가 결정타를 맞았다고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기도 하구요.
기아차 부도 이전만해도 `한국의 아이아코카`, `자동차 경영의 귀재`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다녔던 김선홍 기아차 전 회장은 97년 부도 무렵에 "정부와 채권단이 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안기부가 녹취한 X파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삼성그룹은 기아차 부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합니다. 기아차 부도가 국가 부도사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아차가 무너진 이유가 과연 삼성 때문일까요. 삼성 계열사들이 4000억원 안팎에 달하는 단기자금 회수에 나서지 않았다면 기아차가 망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IMF사태도 초래되지 않았을까요.
젊은 나이에 기아차에 들어와 회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고, 현재 기아차의 부장급 간부로 근무하는 한 지인은 `난센스`라고 잘라 말합니다.
기아특수강과 기산 등 핵심 계열사들의 방만한 경영과 단기자금을 끌어쓸 정도로 문제가 있었던 자금운용, 노조의 과도한 경영권 참여 등으로 이미 허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허약한 얼룩말이 사자의 공격을 받는다`고 말한 김선홍 회장의 말을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기아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죠. 물론 기아의 지나간 역사는 방만한 경영이 초래할 결과를 충분히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