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샌더스 의원을 굳이 한국의 ‘수저론’ 도식으로 분류하자면 ‘흙수저’에 가깝다. 그는 뉴햄프셔주의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압승을 거둔 이후 “아버지는 돈 한 푼 없이 미국에 온 폴란드 이민자였고, 어머니는 꿈이 내 집을 갖는 것이었는데 이를 못 보고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런 출신 성분 때문인지 그의 공약은 철저히 미국 사회의 불평등 해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저임금을 두배로 인상하고 공립대학의 등록금을 폐지하고 전 국민의 건강보험을 확대하겠다는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놓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샌더스 의원의 공약이 모두 실현되려면 18조달러의 재원이 들어가리라고 추산했다. 우리 돈으로 2경원이 넘는 엄청난 돈이다. 샌더스 의원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으면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위 0.3%에 속하는 최상위 자산가들에게 높은 상속세를 매기고,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에게 투기행위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금융거래세를 신설하고, 해외로 공장을 이전한 대기업의 역외소득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거다.
트럼프는 부모로부터 부동산 왕국을 물려받은 정통 ‘금수저’ 출신이지만, 부자 증세와 전 국민의 건강보험, 대기업의 해외 도피 예방 등을 핵심 공약으로 삼고 있다. 방법론에선 샌더스 의원과 차이가 있지만, 경제를 바라보는 방향에선 공통분모가 적지 않다. 진보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진 폴 크루그먼 교수가 “경제학에선 트럼프가 옳다”고 공개적으로 거들었을 정도다.
사실 샌더스 의원과 트럼프는 미국의 주류 정치판에선 ‘이단아’로 치부된다. 한명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며 강경노선을 걷고, 다른 한명은 ‘막말 논란’ 속에 공화당 내에서도 골칫거리다.
미국의 불평등 문제는 이제 덮어두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인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한때 전체 인구의 60%가 넘던 미국의 탄탄한 중산층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인구의 절반 밑으로 떨어졌다. 40여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소수의 상류층이 더 많은 부를 독식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는 추세다.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62%가 미국의 현 경제체제가 불공평하다고 답했고, 그렇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34%에 불과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중산층을 어떻게 다시 살릴 것인가라는 문제가 관건일 것”이라고 진단할 정도다.
지금 미국 대선판에서 벌어지는 이변은 불평등에 대한 미국인들의 쌓인 불만이 한편에선 샌더스 의원으로, 다른 한편에선 트럼프 지지로 분출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은 어떤가. 과연 불평등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국땅의 수많은 ‘흙수저’들의 불만이 언제 어떻게 표출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