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김상욱기자]
오늘 증권거래소, 증권협회, 코스닥증권시장, 증권예탁원 등 증권 유관기관들이 보유중인 기금적립금을 주식투자에 사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는 돈가뭄을 겪고 있는 주식시장의 수급에는 다소 도움이 되겠지만 이같은 결정이 급작스럽게 이뤄져 석연치 않은 면도 있다는 지적입니다. 증권부 김상욱 기자가 짚어봅니다.
오늘 설 연휴를 며칠 앞둔 증권시장에 예상밖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증권거래소, 증권협회, 코스닥증권시장, 증권예탁원 등 증권 유관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금적립금 중 약 4000억원을 주식투자에 활용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래서 일까요? 며칠째 급락하고 있던 주식시장이 다소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주가가 반등한 원인이야 여러가지겠지만 이들 기관의 결정도 투자자들의 심리회복에 영향을 줬을 겁니다. 하지만 이같은 결정을 보고 있자니 왠지 씁쓸한 기분과 함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증권 유관기관들의 이번 결정이 신정부의 출범에 맞춰 "축포"를 쏘기 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습니다. "자율결정" 뒤에는 최근 급락세를 지속하고 있는 증시를 받쳐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고관나리의 "한 말씀"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증시의 매수기반을 확충한다는 취지에서 보면 오늘 결정에 문제의 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결정이 나오기까지의 전후사정을 두고 증권가에서는 말이 많습니다. 아무리 증권시장이 최근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지만 증권 유관기관들이 자율적으로 내린 결정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늘 증권가에는 정부 모 국장이 어제 유관기관 담당자들에게 이같은 방안을 고려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들이 회자됐습니다. 증권 유관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금을 채권 등 안전한 자산에만 투자해서야 되겠느냐는 담당국장의 말에 유관기관들이 즉각적으로 반응, 이같은 결정을 도출해 냈다는 거지요.
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발표된 세부내용을 보면 주식투자 결정이 충분한 협의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점이 느껴지더군요. 오늘 이들 기관이 공동으로 발표한 내용의 골자는 "주식형 수익증권이나 ETF 등 장기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내부규정의 정비와 내부절차를 거쳐 2월부터 시행한다"는 겁니다.
기금 적립이 시작된 지 적게는 십수년, 많게는 몇십년이 지났지만 주식의 경우 위험자산으로 분류해 투자대상에서 제외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전에 내부규정에 대한 손질조차 하지 않고 발표부터 했다는 점은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또 이들 기관은 지난 외환위기 시절 주가가 300선 밑으로 추락했을 때도 "주식투자"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득 생각나더군요.
원래 기금적립금은 기관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회원사들간의 이해증진과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조성한 자금입니다. 각 기관은 기금적립금을 운용하고 운용실적 등에 대해 회원총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습니다. 기금적립금을 사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한 유관기관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장기투자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각 기관들의 논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라며 "기금의 운용에 대해 내부규정을 손질해야 하고 이사회와 회원총회 등을 거쳐야 하는 만큼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결정될 만한 사항이 아니다"고 말하더군요.
물론 이번 결정은 각 유관기관들이 협의했고 회원들의 찬성을 통해 집행여부가 결정될 겁니다. 회원들이 이같은 방침에 대해 반대를 하고 나서면 이번 발표는 없었던 것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증권사나 관련기관들이 정부의 결정에 대해 내놓고 반발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개별 회사의 문제가 아닌 이번과 같은 공동의 의사결정이 필요할 경우에는 소위 "찍히는" 문제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 정부는 그동안 증시가 하락할 때마다 연기금의 증시 투입과 신상품 허용 등 표면적인 대책들을 마련해 왔습니다. 물론 이번의 경우는 유관기관들이 자율적으로 협의하고 결정한 문제이지만요.
격언에 "瓜田에 不納履요, 李下에 不整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오이밭을 지날 때는 신발 끈을 매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거지요.
오늘 증권 유관기관들의 결정을 보면서 이 격언이 생각나는 건 제 시각이 너무 편협하기 때문일까요. 이들 기관이 "시장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순수한 의도를 몰라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