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가락 수술 받다 생명 잃어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성귀옥(36)씨. 성 씨는 요즘 자신이 의료인의 한 명이라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 대형병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성 씨도 의료사고 피해자들에게 대형병원들의 침묵이 이처럼 무서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성 씨의 어머니 정순애(57)씨는 지난 2005년 6월 광주의 한 병원에서 손가락 수술을 받다가 숨지고 말았다. 광양의 한 공장에서 철근에 손가락 세 마디가 끼는 사고를 당한 성 씨의 어머니는 광주의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위해 전신마취를 받았는데 결국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성 씨는 어머니의 죽음이 명백한 의료사고라고 믿고 있다. 성 씨는 "명백한 의료사고다. 손수술 받은 부위가 손가락 끝마디들이었고 생명의 위급을 다투는 응급상황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수술실에서 나오는 어머니를 만났을 때는 이미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 의사들은 침묵, 소송은 무기한 연기!… 법원도 대책이 없어
성 씨는 병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1년 2개월이 다 되도록 재판이 전혀 진행되고 있지 못하다. 다른 소송이라면 이미 끝나야 할 때가 다 됐지만 재판이 진행되지 못하고 무기한 연기돼 버린 것은 유명 병원들이 하나같이 의료사고 기록을 검토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고려대병원, 연세세브란스병원, 한양대병원, 마취통증의학회, 대한의사협회까지. 의료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이 모든 기관들은 모두 성씨 어머니의 의료 기록을 검토해달라는 법원의 공문을 받았지만 거절해 버렸다.
재판을 맡은 서울북부지법측도 뾰족한 수가 없다. 서울북부지법의 양재호 기획 판사는 법원의 난감한 상황을 설명했다. 양 판사는 "의료소송의 경우 법관이 의료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권위있는 의료기관의 자문 없이 소송을 진행한다는 게 정말 무리다. 지금 들어온 감정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지금 담당 판사님이 재판을 연기해 놓고 어떻게 할 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 병원은 바빠서 못 해준다지만…
7차례에 걸쳐 정 씨 사건에 대한 감정을 거부한 병원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지난 1월 법원의 감정 요청을 거절한 서울대병원 측 관계는 "바빠서 못 해 준거다. 다른 병원도 안해줬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고려대 안암병원은 "교수들 스케줄이 안돼서 못해줬다. 인원이 한정돼 있고, 담당 마취과는 특히 바쁜 과"라고 해명했다. 삼성서울병원 측은 '감정경험'이 없어서 감정을 해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삼성병원 관계자는 이어 "솔직히 민감한 사안이니까 교수들이 부담스러워 하고 안하려고 한다. 행정과에서도 교수들한테 자꾸 해달라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양대병원은 마취통증의학회에 감정을 떠넘겼고 마취통증의학회는 다시 대한의사협회에 감정을 떠넘겼다. 하지만 결국 대한의사협회마저도 지난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법원의 감정요청을 거부해버렸다.
◆ '침묵의 카르텔'이 국민의 재판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의료소비자 시민연대 강태언 사무총장은 병원들의 이같은 태도를 '침묵의 공조(共助)'라고 꼬집었다. 강 사무총장은 사무실에 감정거부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사연이 쌓여있다면서 의사들의 공고한 침묵의 카르텔은 조직화된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강 총장은 "구체적인 전공으로 들어가면 의사들이 서로 다 알게 된다. 상부조직으로 의사협회가 있고 그 밑에 각 과별 협회에다 학교 선후배, 직장 동료, 학회에서도 보고 결국 다 안다. 그러니까 침묵함으로서 의사들끼리 서로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소산의 정재훈 변호사는 병원들의 행태가 헌법에 명시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 변호사는 "소송을 걸 수 있다고 재판권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의사들이 감정을 안 해주면 실제 재판이 진행이 안 되니까 실질적으로는 재판권이 침해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이어 "민사소송법에 감정 부분 제334조엔 '감정에 필요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은 감정할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돼 있다"며 "의료소송 분야만큼 감정이 필요한 분야가 없는데 의사들이 이 조항에 따른 처벌규정이 없어 감정의무를 전혀 지키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 의사들에게 입증 책임을 지워야 하지만…
현재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의료사고를 당한 환자나 그 가족들이 의료사고임을 입증해야 한다. 의사들이 잘못된 동료의식으로 동료의사의 잘못에 대해 침묵하는 이상, 전문지식도 없고 의료기관이 작성한 의료기록조차 구하기 어려운 피해자 입장에서 과실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수년 전부터 의료소송의 경우 '원고 입증주의'에서 벗어나 의료기관이 입증책임을 지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법제정이 계속 좌절되고 있다. '의료기관이 의료사고가 아님'을 입증토록 한 법률안도 3개나 국회에 제출돼 있지만 정치적 상황에 밀려 실질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
경실련의 사회국 김동연 간사는 "내부 고발자가 나오기 어려운 것처럼 의사가 다른 의사의 과실을 증명해주길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그래서 법제정이 필요한데 국회에서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번번히 법제정이 좌절돼 왔다"고 말했다.
6월 임시국회가 지나버리면 바로 대선이 기다리고 있다. 대선 시기의 정치화된 국회에서 의료사고 관련법 제정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결국 6월 임시국회에서 의료사고 관련법을 처리하지 못하면 의료사고 피해구제법 제정은 또 다시 좌절될 가능성이 크다.
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의사들의 '침묵의 카르텔'과 피해자들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