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 탄생시킨 '국가대표론' 비난한 공정위…항공 빅딜 선택은?

국가 산업키우고, 해외에 대응 불가피
21세기에도 여전히 산업논리가 지배해
생산자·공급자 외 소비자·수요자 이해도 중요
  • 등록 2020-11-17 오전 11:01:30

    수정 2020-11-18 오전 11:00:19

[세종=이데일리 김상윤 기자]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치열한 국내경쟁을 통해 세계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른 반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사실상 독점으로 소비자 후생이 감소했다.”

김병배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현 공정거래실천모임 대표)은 지난 2007년 대항상공회의소 초청 조찬강연에서 재계 주요인사를 앞에 두고 이례적으로 ‘반성문’을 발표했다. 공정위는 앞서 2002년 독과점 우려가 컸지만, 일부 조건을 부여하면서 기업결합(M&A)를 했고 두고두고 뒷말이 많았다. 그는 재계에서 나오는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국내 대표기업(내셔널 챔피언)을 육성해야 한다’, ‘과당경쟁과 출혈경쟁은 해롭다’는 주장은 소비자와 수요자를 무시한 생산자, 공급자 중심의 사고라고 일축했다.

‘내셔널 챔피언론’은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 시절에 주로 써왔던 산업정책의 일환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대기업별로 핵심 업종을 나누고 자원을 몰아줘서 빠르게 경제성장을 도왔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비자, 노동자의 이익은 상대적으로 무시됐던 측면도 분명히 있다. 어느 정도 시장이 성숙한 상황에서 여전히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경제학자 사이에서도 논란이 크다.

(그래픽= 문승용 기자)


다시 고개 드는 ‘산업정책’…EU에도

‘내셔널 챔피언론’이라는 유령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유럽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알스톰과 독일 지멘스의 철도차량생산 부문 합병을 시도했다. 초고속열차 시장을 중국이 잠식하는 상황에서 두 회사를 합병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야 유럽산업 경쟁력이 유지된다는 논리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산업정책이 강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지난해 초 유럽 집행위원회(EU Commission)은 판단은 달랐다. 정치적 압박이 거셌지만 경쟁당국은 사업자가 아닌 소비자 후생 문제에 집중했다. 두 회사가 하나로 합쳐져 시장을 독과점하면 결국 철도가격이 인상되고,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수 있다고 판단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프랑스와 독일 수장은 경쟁법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며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압박했다. 하지만 유럽 각국마다 산업별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법 개정 시도는 무산된 상황이다.

우리나라 역시 ‘내셔널 챔피언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7월 이뤄졌던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인수는 금융위원회,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부처에서는 한국 조선사 생존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가적 프로젝트다. 선박산업 특성상 전·후방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조선사 연쇄 도산보다는 하나의 통합선사를 만드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조선사가 사라지면 고용악화는 불가피하고, 궁극적으로 시장이 사라지면 소비자가 얻을 이익이 없다는 논리가 우세했다. 한진해운이 파산되면서 국내 물류분야의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논리도 뒷받침되고 있다.

공정위는 이미 1년을 훌쩍 넘었던 심의에 대해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당초 김상조 전 공정거래위원장(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유럽이 M&A 심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한국 공정위가 먼저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고,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공언은 사라지고 현재 공정위는 EU의 눈치를 보고 있는 현실이다. 공정위 안팎에서는 EU가 먼저 결론을 내리기 전에 공정위가 먼저 결론을 던질 가능성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가 산업정책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공정위에 또 다른 숙제가 던져졌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M&A다. 해외 사업자에 매각하는 방안도 있지만 국가 기간산업을 해외에 내줄 수 없다는 정무적 판단 아래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을 합치기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내셔널챔피언론’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산은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거래를 통해 탄생하게 될 통합 국적항공사는 글로벌 항공산업 톱10 수준의 위상과 경쟁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코로나 위기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 및 코로나 종식 이후 세계 일류 항공사로 도약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면서 “노선 운영 합리화, 운영비용 절감, 이자비용 축소 등 통합 시너지 창출을 통해 수익성 제고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는 중복노선을 통합해서 통합사의 효율성을 달성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노선 경쟁이 줄수록 소비자 피해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소비자와 수요자를 배제한 생산자, 공급자 중심의 사고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해외노선의 경우 해외항공사와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 있고, 국내 항공사 역시 저가항공사(LCC)의 활발한 진입으로 경쟁압력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이라는 국적노선이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가격인상을 제한하고 있는 시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만약 통합사가 나올 경우 시장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항항공, 아시아나항공 비행기가 나란히 활주로에 서 있다.(사진= 이데일리DB)


정부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현재 국적항공사 통합은 한진칼의 경영권 다툼에 정부가 개입하는 꼴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한진칼의 최대주주인 강성부 펀드(KCGI) 등 3자 주주 연합이 산은의 한진칼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반발해 법적 효력 무효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시장이 어 느정도 완숙한 단계에서는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여러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시장 중심의 경제가 중심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불리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자유방임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이 시대의 경제학의 과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고, 이 시대 정치의 과제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민주주의 틀 내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언급했다. 김상조 정책실장도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늘상 말하는 논리다.

공정거래법 제1조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창의적인 기업활동을 조장하고 소비자를 보호함과 아울러 국민경제의 균 형있는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8월 내정 당시 언론에 처음으로 던졌던 대목이다. 여러 정치·사회적 이슈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조 위원장이 경쟁당국의 합리적인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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