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edaily 이의철특파원]
사상 최대의 합병으로 일컬어지는 휴렛팩커드(HP)와 컴팩컴퓨터간의 합병은 양사가 첫 합병선언을 한 이후 7개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HP와 월터 휴렛간의 법정공방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측은 3일간의 법정 공방을 끝내고 지난 주말 자신들의 주장을 요약한 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이 소송은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중요한 이슈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만 합니다. 뉴욕에서 이의철 특파원이 관전기를 전합니다.
휴렛팩커드와 월터 휴렛(HP의 공동창업자 윌리엄 휴렛의 아들입니다)간의 3일간의 법정공방이 모두 끝났습니다.지난주 금요일 양측은 요약 리포트를 법원에 제출했고 이제 법원의 최종 판결만 남은 상태입니다.법원은 내달 7일께 결심공판을 열 것으로 전망됩니다.
3일간의 심리과정에서 재판은 많은 화제를 뿌렸습니다.우선 공동 창업자의 자손(HP주식 5.8%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이기도 합니다)인 월터 휴렛이 회사와 소송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자아냅니다.또 합병을 진행시킨 경영진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가" 라는 문제도 나옵니다.여기서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문제가 "HP는 과연 누구의 회사인가"하는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즉 합병을 결정한 경영진의 판단이 주주,종업원,고객,경영진 중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냐(누구의 이해에 가장 복무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이해당사자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경영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며(주주-대리인 이슈),나아가 회사와 기관투자가간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HP CEO인 칼리 피오리나의 보이스메일과 전화통화내용까지 공개돼 재판의 양념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HP의 칼리 피오리나는 세번의 심리에서 모두 증인으로 출두했으며 마지막 증언에선 지친 모습으로 "이제 HP의 직원들에게 돌아가겠다"고 밝혔습니다.
피오리나의 증언은 주로 그녀의 대화나 보이스메일내용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이었습니다.피오리나가 한 대화내용중 "이번 합병은 HP에 무척 중요한 일이며 우리(HP와 도이체방크)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도 무척 중요하다"고 언급한 부분이 있는 데 이게 대체 무슨 뜻이냐는 것입니다.피오리나와 도이체방크 간부간의 이같은 대화내용은 휴렛측 변호사에 의해 녹음돼 법원에 제출됐습니다.
피오리나는 "지속적인 좋은 유대"라는 말은 회사와 기관투자가간의 일반적인 관계를 지칭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합병에 찬성표를 던져달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죠.피오리나의 보이스메일에서 공개된 "특별한 조치(extraordinary)"란 단어에 대한 종전 설명과 맥을 같이 합니다.
월터 휴렛측 스테판 닐 변호사의 일관적인 주장은 "HP의 경영진은 컴팩과의 합병으로 이익이 줄어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이는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며 더구나 이를 은폐한 것은 사기행위라는 것이 월터 휴렛 측 주장의 요지입니다.피오리나의 보이스메일이나 대화내용,사내 메모 등은 이를 증명하는 증거로 법원에 제출됐습니다.
반면 HP의 주장은 경영진의 경영적 판단이 회사에 해가된다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월터 휴렛측은 합병의 부작용을 주장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도이체 방크가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는 대가로 뇌물을 주기로 했다는 주장도 근거없다는 것입니다.
그 최종적인 판단은 법원에 맡겨지겠지만 법률전문가들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판단은 대체로 HP측에 유리합니다.무엇보다 월터 휴렛측이 "경영진의 사기혐의를 증명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정황상 그럴 수는 있겠다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셈입니다.그러나 HP의 고민은 딴데 있습니다.이번 소송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처뿐인 영광"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재판과정에서 속속 파헤쳐진 CEO의 이메일이나 보이스메일 등은 둘째 치더라도 회사측이 입은 이미지손실이 만만치 않습니다.무형의 손해를 입은 것이죠.
하기야 월터 휴렛도 손해를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지난주말 HP의 이사회는 월터 휴렛을 이사회 멤버에서 제외하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이미 HP이사회는 1개월 전 월터 휴렛을 이사회 후보로 추천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었더랬지요.
회사 창업자의 가족이 이사회에서 제외된 것은 HP라는 회사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월터 휴렛이 이번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말 그대로 "국 쏟고 국에 데인" 꼴이 되겠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갖가지 이슈를 드러낸 그 공로는 적지 않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