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묻지마 폭행범' 왜 구속 안됐나…"체포과정 위법"

法 "긴급체포 요건 안 갖추고 위법하게 체포"
"강제 수사 적법 절차, 영장주의 원칙 위배"
철도경찰 "신속 검거 필요성 있다고 판단"
  • 등록 2020-06-05 오후 1:56:21

    수정 2020-06-05 오후 2:26:55

[이데일리 공지유 기자] 서울역에서 ‘묻지마 폭행’을 저지른 30대 남성의 영장 기각 사유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수사한 철도특별사법경찰대(철도경찰)는 피의자에 대해 도주 등 우려가 있어 불가피하게 체포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법원은 충분한 요건을 갖추지 않은 상태의 긴급체포는 영장주의에 위배된다고 봤다.

서울역에서 처음 보는 여성을 폭행하고 달아났다가 검거된 이모씨가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씨는 지난달 26일 공항철도 서울역 1층에서 모르는 사이인 30대 여성의 왼쪽 광대뼈 부위 등을 가격해 상처를 입히고 도주한 혐의를 받는다. (사진=연합뉴스)
재판부 “체포 과정 위법…영장주의 위배”

서울중앙지법 김동현 영장전담판사는 4일 오후 8시 30분쯤 상해 혐의를 받는 이모(32)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며 “긴급체포가 위법한 이상 그에 기초한 이 사건 구속영장 청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법원이 기각한 가장 큰 이유는 체포 과정이 적법하지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형사절차상 피의자를 체포할 때에는 ‘영장주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의 신체적 자유 보장을 위해 체포·구속 등 수색을 할 때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찰은 피의자를 체포할 때 검찰에 체포영장을 신청하고, 검찰은 판사에게 청구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다만 현행법상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는 등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영장 없이 피의자를 긴급체포할 수 있다.

법원은 경찰이 긴급체포 요건을 갖추지 않은 상태로 위법하게 피의자를 체포했다고 봤다. 법원에 따르면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 영상과 주민 탐문 등을 통해 이씨의 성명, 주거지, 핸드폰 번호 등을 파악한 후 이씨가 살고 있는 자택에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또 이씨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자 강제로 출입문을 개방하여 집으로 들어간 후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씨를 체포했다.

김 판사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원과 주거지 및 핸드폰 번호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피의자가 주거지에서 잠을 자고 있어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상황도 아니었다”며 “피의자를 긴급체포하고 압수수색을 실시할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경찰 “신속체포 불가피”…피해자 측 “두려움 떨게 돼”

하지만 경찰은 피의자를 신속하게 검거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철도경찰은 5일 보도자료를 통해 “피의자가 불특정 다수에게 몸을 부딪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해 제2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히 검거할 필요성이 있었다”며 “체포 당시 피의자가 주거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했으나 휴대폰 벨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 도주 및 극단적 선택 등 우려가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 사건 피해자 가족은 5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기각 이유가 황당하다”며 “분노가 더욱 차오른다”고 법원을 비판했다.

김 판사는 4일 영장 기각 이유를 설명하며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채라고 할 것”이라며 “범죄 혐의자라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주거의 평온을 보호받음에 있어 예외를 둘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은 이에 대해 “최근 본 문장 중 가장 황당하다”며 “덕분에 이제 피해를 고발한 우리들은 두려움에 떨게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은 잠도 못 자고 불안에 떠는 등 일상이 파괴됐는데 가해자의 수면권과 주거의 평온을 보장해주는 법이라니 (대단하다)”라며 “제 동생과 추가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법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고 토로했다.

향후 수사기관은 불구속 상태에서 이씨를 조사해 재판에 넘기거나, 영장 기각 사유를 검토한 뒤 적법한 절차에 따라 구속 영장을 재청구할 수 있다. 철도경찰 측은 “법원 기각 사유를 검토한 후, 향후 법과 원칙에 따라 여죄를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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