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동안 세풍 사건 공판 등을 통해 삼성이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측에 제공한 대선자금이 적게는 10억원, 많게는 60억원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삼성은 이 후보측에 최소한 90억원 이상을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검찰은 98년 세풍 사건 1차 수사 당시에 계좌추적을 통해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에게 건네진 것으로 밝혀낸 삼성 비자금 10억원의 전달자가 김인주 삼성그룹 재무팀장(상무이사)이 아닌 홍석현 사장임을 간파할 수 있었는데도 김인주 상무의 진술에만 의존해 넘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검찰은 삼성이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 쪽에 60억원을 건넨 것으로 드러난 세풍 사건과, 매형인 이건희 삼성 회장이 처남인 홍 전 사장에게 '배달'시킨 돈 가운데 30억원을 '삥땅'한 것으로 드러난 보광 탈세사건과 함께, 삼성이 97년 대선 당시 정치권에 100억원대 이상의 자금을 건넨 것으로 돼 있는 '안기부 X-파일' 내용의 진위를 가릴 단서들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주목된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97년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이하 세풍 사건) 검찰 수사 및 공판기록과 '안기부 X-파일' 내용을 면밀히 비교분석한 데 따른 것이다.
우선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세풍 사건 검찰 수사 및 공판기록에 의하면, 이회성씨는 98년 12월 24일 대검 중수부 1110호 조사실에서 홍만표 검사로부터 피의자신문조서(12회)를 받는 과정에서 삼성으로부터 60억원을 받은 것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위 금원을 받은 일시, 장소에 대해 진술하시오"라는 신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첫째, 97년 9월 초순경 압구정동 모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10억원, 둘째, 10월 초순경 같은 장소에서 10억원, 셋째, 10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서 30억원, 넷째, 11월 초순경 같은 장소에서 10억원 등 총 60억원을 대선자금 지원 명목으로 받았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이씨가 60억원을 삼성의 누구로부터 받았는지는 끝내 진술하지 않으면서 받은 장소만 '압구정동 모 아파트 앞 주차장'이라고 '특정'해서 진술한 점이다. 그러나 검찰은 '장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의 안기부 X-파일 가운데 97년 9월 9일치 녹취록에 따르면, 홍석현 당시 사장은 이학수 삼성 비서실장에게 9월 3일 이회창 후보를 만나 동생 이회성씨를 창구로 정한 이야기 등을 전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9월 4일 아침에 (이회성씨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늦어도 8일 아침까지는 해달라고, '오리발'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토요일(6일) 밤에 오라고, 10시하고 10시5분, 5분 상관으로 돈 내주겠다… 이회성이가 왔는데. 내가 돈을 줬는데, 차를 우리집이 아니라 길에 세웠어… 이번에 준 30억도 다 썼대요. 이회성씨가 이렇게 됐고… 그저께(6일) 2개를 차에 실어줬지요."
녹취록에 따르면 이와 같은 홍 사장의 '보고'를 들은 이학수 실장은 "내가 볼 때 요번에 타이밍이, 우리가 한 게 기가 막혔던 거 같아"라고 말해, 이건희 회장의 돈 심부름을 한 홍 사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요컨대 이회성씨가 먼저 전화를 해와 "형님께서 9월 8일(월) 지구당위원장 연찬회 때 '오리발'이 들어가야 되니 그날 아침까지 집행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홍 사장이 "토요일(9월 6일) 밤 집으로 오라고 해서 2개를 차에 실어 보냈다"니 대선후보 확정 '축하금'으로 돈을 쓸 '타이밍'과 딱 맞아떨어졌다는 얘기이다.
'삥땅'의 신빙성이 큰 까닭은 삼성의 대선 불법자금을 마련한 김인주 삼성 구조본 재무팀장(상무이사)과 돈을 전달한 홍석현 사장, 그리고 돈을 받은 이회성씨의 진술을 비교분석했을 때 '액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정황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회성씨는 검찰 조사에서 누구로부터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으면서도 네차례에 걸쳐 나눠 받은 60억원을 모두 '압구정동 모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 가운데 처음 10억원은 97년 9월 초순경에 압구정동 모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X-파일 녹취록(9월 9일자)에 따르면, 홍 사장은 이학수 실장에게 "이회성이를 '우리집'으로 오라고 해서 2개를 차에 실어 보냈다"고 말했다. 홍 사장은 현재는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 살고 있지만 97년 당시에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았다. 홍씨가 말한 '우리집'은 바로 이회성씨가 말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인 것이다.
문제는 98년 세풍 수사 당시 검찰의 광범위한 계좌추적을 통해 꼬리가 밟히자, 98년 11월 27일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김인주 상무가 진술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97년 9월 초순 밤에, 누가 먼저 전화를 하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차장에서 이회성을 만나 제가 007 가방(두께 15㎝ 정도로 상당히 두꺼움)에 담아간 자기앞수표 1만매(10억원)를 직접 전달하였습니다."
이회성씨는 검찰수사에서 삼성의 누구로부터 받았는지를 진술하지 않았는데 김인주 상무는 순순히 '자기가 직접 전달했다'고 진술한 점이다. 김 상무 또한 이회성씨와 마찬가지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차장에서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김인주 상무의 검찰 '진술조서'에서 알 수 있듯이, 김 상무는 '강남구 수서동 삼성아파트'에 살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돈을 주고받은 장소가 왜 하필이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차장'인지를 캐묻지 않았다. 한 번이라면 모르지만 이회성씨가 한 차례도 아니고 네 차례나 같은 장소에서 돈을 받았다고 진술했는데도 검찰은 '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인지'를 신문하지 않았다.
결국 그룹 오너인 이건희 회장과 그의 처남인 언론 사주를 보호하기 위한 김인주 상무의 헌신적인 '꼬리 자르기'에 검찰이 당한 셈이다.
물론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건에서 100% 김인주 상무의 '알리바이'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안기부 X-파일(10월 7일)에 따르면, 홍 사장이 "이○○가 10억원을 좀 달라고 전화가 왔던데요"라고 말하자, 이학수 실장은 "이○○는 일단 10월 말까지 빼놓고…, 이회창씨는 30개를…"이라고 대화를 나눈 대목이 나온다.
홍 사장은 또 이 실장에게 "사실 이회창씨한테는 10월 1일 연락을 하겠다고 하고서 이제껏 연락 안한 것은 오늘 얘기를 듣고 하려고 했던 거거든요"라면서 "오늘이라도 이회창씨한테 전화로 '회장(이건희)께서 출국하시기 전에 지시가 있었기에 지금 마련중'이라고 하고 2~3일 내로 약속만 할께요"라고 말한다.
이어 이 실장이 "금액은 (이 후보에게 오늘) 얘기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자, 홍 사장은 "그러지요, 경과도 좀 봐가면서…"라고 동감을 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명이서 15개를 운반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30개는 무겁더라구. 이번에는 비서실 김인주가 믿을 만하니까 그 친구, 나, 이회성 셋이서 백화점 주차장에서든지 만나 가지고…. 그전에 귀찮더라도 이회성씨를 일단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여 정보교환도 좀 하고…."
이서가 되지 않아 추적할 수 없는 헌수표로 전달할 때는 혼자서 했지만 현금으로 전달할 때는 무겁기 때문에 '믿을 만한 친구'인 김인주 상무을 불러서 함께 전달했다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그 액수이다.
이회성의 검찰 및 법정 진술에 따르면, 이씨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 주차장에서만 ▲97년 9월 초순경 10억원 ▲10월 초순경 10억원 ▲10월 하순경 30억원 ▲11월 초순경 10억원 등 총 60억원을 대선자금 지원 명목으로 받았다.
그런데 김인주 상무는 검찰 진술조서에서 ▲97년 9월 초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이회성씨에게 10억원을 건넨 것 외에 ▲97년 11월 하순경 한나라당을 방문해 김태원 재정국장에게 자기앞수표 30억원을 직접 전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 30억원은 합법적인 공식 후원금이다.
97년 11월 14일 개정 정치자금법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대가성이 없는 한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은 모두 무죄였다. 삼성측이 11월 하순에 15개 계열사의 법정 한도액(2억원)으로 30억원을 전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인에게는 무죄일 수 있어도 기업에는 유죄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세풍 수사 및 공판기록과 안기부 X-파일에 담긴 홍석현 사장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삼성은 홍 사장을 통해 최소한 90억원 이상을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세풍 수사에서는 60억원을 건넨 것으로 기록에만 남기고 종결처리되었다. 세풍 수사에 이은 99년 보광 탈세 수사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도된 30억원 '삥땅' 보도는 그래서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검찰은 삼성이 이회창 전 후보 쪽에 60억원을 건넨 것으로 드러난 '세풍' 사건과, 매형인 이건희 회장이 처남인 홍 사장에게 '배달'시킨 돈 가운데 30억원을 '삥땅'한 것으로 드러난 보광 탈세사건 수사기록을 면밀하게 재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삼성이 97년 대선 당시 정치권에 100억원대 이상의 자금을 건넨 것으로 돼있는 '안기부 X-파일' 내용의 진위를 가릴 단서들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