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리포트)가난한 CEO들을 위한 변명

  • 등록 2005-09-29 오후 7:26:06

    수정 2005-09-29 오후 7:26:06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한국의 유명한 벤처기업을 꼽으라면 열손가락 안에는 꼭 들어가곤 했던 터보테크가 700억원이라는 거액의 분식회계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대우사태에서 보듯 분식회계는 기업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입니다. 투자자들에 대한 사기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벤처신화의 대표격인 장흥순 회장은 왜 그 죄를 저질렀을까요. 증권부 이진우 기자는 그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의 경계로 떼밀려있는 벤처CEO가 비단 장 회장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샐러리맨들에게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열이면 일곱 여덟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재벌기업처럼 크지는 않더라도 알차고 튼튼한 내 회사를 갖고 싶다는 게 이나라 월급쟁이들의 꿈입니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들이 오늘도 '투잡스'에 관심을 갖고 사업을 구상합니다.

실제로 벤처열풍이 불었던 99년에는 많은 직장인들이 회사를 뛰쳐나와 벤처기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벤처기업을 차려 성공한 사장들은 시대의 영웅으로 부러움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신문들은 틈만나면 벤처갑부들의 재산이 몇백억인지 계산해서 순위를 매깁니다.

이번에 분식회계를 시인한 장흥순 회장은 그런 직장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코스닥 상장법인을 두 개나 갖고 있고 벤처기업협회 회장을 5년이나 맡으면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터보테크는 몰라도 장 회장을 아는 사람도 꽤 많으니까요.

벤처 신화의 주인공들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도대체 이 사람들은 고민이 뭘까?'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머리가 빠진다거나 자식들이 말을 안듣는다거나 배가 자꾸 나온다거나 하는 소소한 고민들이야 한두개씩 갖고 있겠지만 몇날 며칠을 머리싸매고 고민해야 할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벤처기업들의 사장들을 만나보면 저의 이런 질문에 손을 내저으며 다들 그러더군요. "그렇게 좋아보이면 한 번 해보세요. 저도 해보기 전엔 몰랐습니다. 보기와는 정말 달라요"

벤처기업 CEO들의 여러가지 고민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의외로 '돈 고민'이었습니다. 한 벤처기업 사장의 말입니다.

"대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7년만에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시켰습니다. 요즘도 제 주식가치는 100억원이 넘어요. 그런데도 늘 돈 문제가 고민이에요. 큰 돈 번줄 알고 돈 쓰라는 곳은 많은데 제 재산은 팔지도 못하는 주식이 전부거든요"

배부른 사장들의 어줍잖은 투정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의 사정이 실제로 딱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증자를 할 때 이런 고민은 커집니다.

회사가 주주들을 상대로 '사업좀 하게 돈 좀 주십시오'하고 부탁하는 게 바로 유상증자입니다. 그런데 회사의 대표이사도 주주입니다. 대부분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진 주주죠. 그러니 주주인 본인도 회사에 돈을 내야 하는데 그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물론 유상증자를 포기하고 실권을 해도 되지만 돈 달라고 한 사람이 자기 돈은 못 내겠다는 모양새가 영 곱지 않습니다.

주주들로부터 100억원을 조달하려면 대주주인 본인도 지분에 따라서 20억~30억원은 회사에 넣어야 합니다. 그럼 그 돈이 어디서 나올까요?

이런 경우에 벤처CEO들이 택하는 수단은 크게 세가지 입니다. '유비무환형' CEO들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코스닥 상장 전에 미리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주식을 분산해둡니다. 코스닥에 상장되어 주가가 오르면 그 차명계좌의 주식들을 팔아 현금화합니다. 그리고 유상증자를 하게 되면 그 돈을 회사에 넣습니다. 이런 일은 불법이지만 적발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많은 CEO들이 애용해왔습니다.

'자급자족형' CEO들은 이럴 때 자기 주식을 들고 증권사나 은행으로 갑니다. 갖고 있는 회사 주식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리죠. 그 돈을 유상증자 대금으로 내고 주식을 받습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다 보면 이런 '자급자족형' CEO 들은 빚도 많고 주식도 많은 그런 상황이 되죠.

'정면돌파형' CEO들은 그냥 자기 주식을 적당한 시점에 시장에 내다 팝니다. 대개 유상증자 가격이 주가보다 할인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식을 100주쯤 팔면 150주정도의 유상증자에 참여할만한 자금이 나옵니다. 주가가 아주 좋을 때 팔면 판 주식의 2~3배를 유상증자 주식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럴 경우 투자자들이 욕을 하지요. '대표이사가 회사에 확신이 없어서 주식을 판다'는 둥 '자기는 팔면서 우리보고는 사라고 한다'는 둥 말이 많지만, 그냥 정면돌파 합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식이죠.

이번에 분식회계로 문제가 된 장흥순 회장은 '자급자족형'이었습니다. '유비무환형'은 불법이고 '정면돌파형'으로 가기엔 벤처업계의 대부로서 가지는 명예가 마음에 걸렸을 겁니다.

이런 자급자족형 CEO들의 문제는 주가가 내려갈 때가 고민입니다. 100억원어치 주식을 맡기고 50억원을 빌려서 유상증자에 참여했는데 빌릴때보다 주가가 반으로 내리면 돈을 빌려준 사람은 추가로 담보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담보로 맡길 주식도 없습니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결할까요.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리면 방법은 정면돌파형 또는 유비무환형 둘 뿐 입니다. 그런데 정면돌파형의 치명적 약점은 자칫하면 경영권을 잃을 수 있다는 겁니다. 주가가 높을 때 정면돌파해서 팔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주가가 낮으면 지분은 많이 팔고 돈은 얼마 못 건집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CEO들은 알게 모르게 유비무환형을 점점 선호하게 됩니다. 아니면 회사 돈에 손을 대게 되지요.

이런 분위기는 요즘도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주주가 주식을 팔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인 양 손가락질을 합니다. 대주주도 사람이고 돈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예외도 없고 용서도 없습니다. 주식은 못 팔게 하지 돈 쓸일은 많지, 대주주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합니다.

장 회장의 700억원대의 분식회계도 이런 분위기에서 생긴 부작용입니다. 돈 쓸일이 있으면 자기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리다가 주가가 떨어지니 어쩔 수 없이 회사 돈을 끌어다 넣은 것입니다. 물론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한 장회장의 잘못은 당연히 추궁해야 하겠지만, 대책없는 낭떠러지로 벤처기업인들을 몰아가는 업계의 분위기도 함께 바뀌어야 할 듯 합니다.

대주주가 주식을 파는 것이 주주들에게는 마뜩잖은 일이겠지만 가끔은 '그래도 사채 안쓰고 주식 팔아 쓰는구나 그만하면 대견하다'는 시선으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듯 합니다. 이제는 '안그러면 도둑질 해오라는 것 밖에 더 되냐'는 벤처기업가들의 항변에 귀를 기울일 때도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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