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학선기자] 국제유가의 시계바늘이 14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중동지역 전운이 한창 고조될 때다. 그러나 당시 국제유가는 중동지역 정정불안이라는 일시적 요인이 해결되자 곧 하향안정세를 되찾았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중동지역 정정불안, 세계경제 회복에 따른 원유수요 증가, 투기적 매수세가 맞물리며 국제유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게다가 수출만은 살리겠다는 정부 정책으로 고유가 부담이 고스란히 국내 물가 상승으로 전가될 우려가 있다.
자칫하다가는 고물가 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이다.
◇치솟는 국제유가..고유가 장기화 가능성
국제유가의 동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는 41달러 수준에 육박했다. 지난 90년 10월 이후 13년 7개월만에 최고 수준이다.
중동산 두바이유 가격도 배럴당 35달러 수준에 바짝 다가섰다. 정부의 유가대책 기준이 되는 두바이유 10일 이동평균가격은 33달러대에서 내려올 줄 모른다.
전문가들은 고유가 행진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동지역 정정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데다, 세계적인 석유수요 증가, 미국의 휘발유 공급불안, 투기적 매수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사는 현재 유가에 3~5달러 이상의 중동프리미엄이 붙어있다고 분석했다. 중동지역 정정불안이 해소되지 않으면, 웃돈을 주고 석유를 사는 상황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난방유 수요가 적은 여름철에도 고유가 현상이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휘발유 재고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등 휘발유 공급부족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올해 전세계 석유 수요가 16년래 최대가 될 것으로 전망하는 등 세계 경기회복에 따른 원유소비량 증가도 부담이다. 이를 노리고 투기세력 기승을 부려 말 그대로 고유가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정부, `물가` 대신 `수출`
정부는 두바이유 10일 이동평균가격이 배럴당 32달러를 넘자 석유수입부과금과 관세인하 등 가격 안정화 조치를 취했다. 최악의 경우 비축유 방출과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등의 대책을 실시할 방침이지만, 고유가에 대해 딱부러지는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환율을 통해 고유가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지만, 아직 고려단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정경제부 윤여권 외화자금과장은 "최근 유가가 오름세를 보이고 있으나, 이는 전세계적 현상인 만큼 환율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유가상승에 따른 물가문제를 고려해 환율정책을 운용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환시장 한 딜러는 "아직 정부의 매도개입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전했다.
문제는 고유가가 계속될수록 물가상승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날 한국은행이 발표한 `4월중 수출입물가지수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수입물가는 전년동월 대비 8.2% 급등, 지난해 11월 이후 6개월 연속 상승했다.
한은 경제통계국 윤재훈 과장은 "수입물가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가중치는 16%에 불과하지만 석유류 제품을 비롯한 파급효과까지 환산한다면 영향력은 40~50%에 이른다"며 "유가 상승이 물가 상승에 그대로 직결됐다"고 말했다.
◇일부선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한은이 내놓은 2000년 산업연관표를 이용한 물가파급효과 분석에 따르면 원유값이 10% 오르면 소비자물가는 0.37%, 생산자물가는 0.61% 상승한다.
에너지 경제연구원은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35달러를 넘어서면 국내총생산(GDP)은 3.67%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소비자물가는 1.53%포인트, 이자율은 7.96%포인트 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조심스럽게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LG투자증권 서철수 애널리스트는 "현재와 같은 고유가 상황이 계속되기는 힘들 것"이라면서도 "만약 고유가가 지속된다면 산업경기 위축과 동시에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SK증권 오상훈 팀장은 "고유가 상황에서는 주가와 금리가 동반 약세로 갈 수 있다"며 "정부가 인플레 대처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막연한 낙관보다 조금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은 아직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나 고유가에 따른 물가 상승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해외요인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현재로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올 경기전망이 하반기 유가안정을 전제로 짜여진 만큼 고유가가 계속된다면 하반기 물가안정에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