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리포트)'콕스'를 기다리며

  • 등록 2006-03-14 오후 7:18:50

    수정 2006-03-15 오후 12:35:32

[이데일리 이진우기자] 매물로 나온 마지막 남은 대형은행인 외환은행을 누가 인수하느냐가 요즘 은행권의 뜨거운 관심입니다. 하나은행과 국민은행이 머리띠를 두르고 인수전에 뛰어든 것 같구요. 외환은행을 매물로 내놓은 외국계 펀드 론스타는 인수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자신들이 보유한 외환은행 지분 가격이 올라간다는 점에서 내심 열기가 더 뜨거워지길 바라는 상황입니다. 증권부 이진우 기자는 이 과정에서 뭔가 하나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한 번 들어보시죠.

저에게는 학창시절 잊혀지지 않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던 길에 패싸움이 벌어졌는데요. 우리쪽은 20명이 넘었고 상대는 다른 학교 학생이었는데 단 한 명이었습니다. 어쩌다 우리쪽 학생과 시비가 붙었는데 마침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많았던 상황이라 한 명을 빙 둘러싼 모양이 된 겁니다.

제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라고 말을 꺼냈던 이유는 그 싸움의 결과 20명이 넘던 우리쪽이 결국 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픈' 기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편 20여명은 주먹을 별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가 당했기 때문이죠.

특별한 전략이나 전술에 당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 상대쪽 녀석이 우리편의 약해보이던 한 친구를 선택해서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20명의 우리편들은 그냥 그 광경을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달려들거나 눈짓이나 손짓만이라도 하면 나머지 20명이 한꺼번에 덮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첫 단추'를 끼우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놈에게 '선택 받은' 우리편 한명은 곧 쓰러졌구요. 그 녀석은 땅에 침을 멋있게 탁 뱉더니 빙 둘러싼 우리편 20여명을 한바퀴 노려보다가 유유히 걸어나갔습니다. 우리편 20여명은 그 순간 두 줄로 쫙 갈라지며 그 녀석의 길을 터주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놈만 팬다'는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유명한 대사가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 20여명중 하나였던 저는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아군은 적을 더 이롭게 할 뿐이라는 교훈을 얻었죠.

요즘 론스타를 상대로 '외환은행을 사겠다'며 덤벼드는 우리 은행들의 모습에서 저는 예전 그 학창시절의 '20대1 전투'를 떠올립니다.

론스타는 애초부터 외환은행 지분을 길게 갖고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인수과정에서 불거진 탈세와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죠.

그런 론스타에게 회생의 찬스를 준 것은 외환은행을 인수하겠다는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의 열띤 경쟁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외환은행의 몸값만 껑충 뛰었습니다. 누가 외환은행을 비싸게 산 만큼 론스타의 주머니는 불룩해질 것입니다. 국민들은 뭉터기로 빠져나가는 국부를 멍하니 쳐다보는 수밖에 없을 터이지요.

국민은행이나 하나은행의 입장에서도 별다른 묘안이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감독당국이 별다른 신호를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까짓 외환은행 안산다'는 강수를 론스타에 던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은행들도 같은 방향으로 도와줘야 하는데 그러다 다른 은행들이 '사실 우리는 관심 있다'는 식으로 나오면 뒷감당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부도 민간은행의 매각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직접 손을 걷어부치고 표나게 여기저기 간섭할 입장은 아니지만, 국익을 위해 요령껏 행동하지 못하는 정부라면 굳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뭡니까? '관치' 아니면 '방관'이라는 이분법의 유치함에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는 '부실자산'이라는 딱지가 붙은 수많은 알짜 자산들을 들고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 외국계 투자은행 앞에 줄을 선 적이 있습니다. 좀 더 전략적으로 대응하면 비싸게 팔 수도 있었겠지만 '안 팔면 나만 손해'인 상황에서 '국익'이나 '모두의 승리'를 이야기 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거죠.

외환위기 이후에도 국내의 휴대폰 회사들은 세계를 휘젓고 다니면 우리나라 회사들끼리 경쟁을 벌였습니다. 어느 한 회사가 계약을 맺으면 그 정보를 빼내서 더 낮은 단가를 제시해 계약을 뺏어오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당시 휴대폰 업계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휴대폰 회사의 홍보담당자는 상대회사 이름도 없고 납품 규모도 계약금액도 빠져있는 보도자료를 보내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회사이름이 알려지면 경쟁회사가 당장 쫓아가서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게 이유였죠.

반면 전세계의 대형 인수합병(M&A) 시장을 주무르는 외국계 투자은행들은 뻔한 시장을 놓고 자기들끼리 피를 흘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제안서를 함께 내기도 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룰에 따라 번갈아가며 일을 나눠맡습니다.

카누 경기를 보고 있으면 뱃머리에 앉아서 노는 젓지 않고 구령만 붙이고 있는, 좀 한가해 보이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를 콕스웨인, 또는 콕스라고 부르는데 한 번이라도 더 노를 저어야 이기는 경기에서 한 명의 선수가 아쉬운 판에 굳이 놀고 있는 '콕스'를 정해두는 이유는 뭘까요.

비즈니스에서도 업계의 원로들, 회사의 리더들, 정부의 고위당국자들은 보이지 않게 그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그에게 노를 쥐어주지 않은 이유는, 몸무게가 꽤 나가보이는 그를 굳이 배에 태우는 이유는 그 자리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조화롭게 지휘해달라는 뜻일텐데요. 우리 배에 탄 콕스는 '자율경쟁'을 외치는 것 외에는 늘 침묵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가 콕스라는 걸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학창시절 20대1의 싸움판에서 느꼈던 초조함이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요즘에도 다시 떠오르는 건 우리의 싸움실력이 여전히 어설프다는 반증이겠죠. 결과가 뻔히 보이는 상황이지만, 정답도 눈에 보이는 상황이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런 지금이야말로 '콕스'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콕스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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