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자의 공약사항들을 정책으로 실행하려는 과정에서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들이 발생, 시장에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담당하고 있는 통화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된다.
◆통화정책 어디에 맞춰야 돼?..성장이냐, 안정이냐
당선자의 대표적 공약인 7% 성장률 달성을 위해서는 통화정책을 부양적 기조로 돌릴 필요가 있다. 금리를 낮은 수준으로 가져가 유동성을 풀어줌으로써 투자와 소비를 진작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문제는 최근의 국내외 경제상황을 감안할 때 물가와 부동산 등 특정 목적을 위해서는 긴축적 통화기조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부동산 투기 억제를 위해 통화정책을 동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동산 세금 규제를 풀어준 결과 집값이 치솟을 경우 금리인상을 통해서라도 가격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방침을 한국은행에 분명히 각인시켰다.
물가도 마찬가지. 국제 유가와 곡물가격 상승 여파로 새해 벽두부터 물가가 뛰어오를 조짐을 보이자 인수위와 한나라당은 신속한 종합대책을 내놓으라고 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 서민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이 닥칠 것이라는 우려까지 제기했다. 치솟는 물가의 고삐를 잡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는 금리인상이라는 점에서 성장을 위한 부양적 통화기조(금리 동결 내지 인하)와는 상반되는 정책을 요구하고 나선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장에서는 도대체 새 정부가 통화정책을 어떻게 가져가겠다는 것인지, 이해 상충되는 공약들을 어떤 수단으로 실천에 옮길 것인지를 놓고 적잖은 혼란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책 목표에 우선 순위가 있고, 진행상황에 따라 금리정책을 동원하는 데에도 순서가 있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관건은 상황과 역할에 대한 한은의 판단이다.
◆`최우선 과제는 경제살리기`..성장에 금리요인은 전제 안돼
이명박 당선자의 10대 공약중 최우선 순위는 `연 7% 성장, 300만개 일자리 창출`이다. 차기 정부 정책방향도 여기에 맞춰질 전망이다. 성장을 위해 부양적 통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지만 당선자의 공약 사항을 보면 7% 성장을 위한 수단에 `금리나 통화정책`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7% 성장률 달성을 위한 1차 실천사항은 투자활성화 조치다. 공공부문 혁신과 대운하 건설 등 기반시설 확대를 통해 우선 성장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것이다. 또 그동안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해 온 과잉규제와 높은 세율을 정비해 친기업·친시장 정책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새 정부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인수위도 이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투자 활성화는 이 당선자가 `친기업`(비즈니스 프렌들리)을 외치며 몸으로 뛰고 있고, 인수위도 재경부 등 관련부처에 경제살리기 공약 실천을 위한 세부이행 방안을 요청해 놓은 상태다. 인수위는 다만, 과도한 긴축이 성장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은 분명히 하고 있다.
◆금리인상 통한 부동산 안정..`한은에 각인은 시켜야`
그동안 숨죽여 왔던 부동산 가격이 들썩거리고 있다는 점은 인수위원 등 새 정부 정책 입안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운하 사업이 속도를 내면서 지방의 땅값이 고개를 치켜드는 분위기다. 이같은 상황에서 종부세와 양도세 등 부동산 세제를 공약대로 풀어놓을 경우 집값이 치솟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이 당선자도 부동산 가격안정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는 상황. 인수위는 `시기조정`을 택했다. 그래서 "(부동산 세금규제를 풀기전에) 1년 가량 시장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말이 나왔다.
장기보유 1가구 1주택자의 양도세와 종부세 감면은 주택공급 확대와 함께 이 당선자가 내세운 주요 공약사항. 언젠가는 풀어줘야 할 규제라는 얘기다. 총선 표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한나라당은 "양도세 인하는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책 입안자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부동산 가격 안정이라는 대전제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통화정책 카드다. 부동산 규제를 풀어서 주택가격에 투기적 요인이 발생할 경우 중앙은행이 물가 타령만 하고 수수방관해선 안된다는 논리다. 정부와 협조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만수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는 한국은행 업무보고 브리핑에서 "부동산 투기는 세계 어디서나 과잉유동성으로 생기며, 과잉유동성은 통화정책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투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은이 통화정책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며, 투기 발생시 정부 못잖게 한은에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미리 못박은 대목이다.
◆"물가안정은 당선자의 최우선 과제"..한은의 판단은?
물가 안정은 법률에 명기돼 있는 한국은행의 설립 목표다. 다른 부분을 모두 양보한다고 해도 이 부분 만큼은 포기하면 안된다는 의미다.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국내외 상황이 심상치 않다. 인수위와 한나라당이 앞다퉈 나섰다. 평소 이 정도 상황이라면 긴축적 통화정책을 압박하는 분위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물가안정의 방점이 정확히 한은을 향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 의장은 "인플레로 인해서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서민생활이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공약으로 내걸었던 7개 생활비 절감 방안에 대해서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처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정부에서 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황이 상당히 급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 정부에서 이런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 국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굳이 싫다고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인플레를 다룰 수 있는 효과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깃은 공약사항인 7개 생활비 절감방안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기름값과 통신비, 고속도료 통행료, 사교육비, 보육비, 약값 인하 등이다. 이런 사안들을 현 정부가 머뭇거리지 말고 적극 시행에 옮겨 서민들의 체감물가 부담을 덜어달라는 주문이다.
통화정책이 물가에 미치는 파급시차를 감안할 때 지금은 한국은행보다는 행정부가 나설 때라는 시각이 뚜렷해 보인다. 이미 한은은 지난해 7,8월까지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왔고, 이 효과는 올해부터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면 이후 금리인상을 통한 대응에 나설 여지는 남아있다. 인수위는 물가와 부동산을 묶어 한국은행에 부담을 지웠다. 이 당선자가 한은의 역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물가안정은 당선자의 최우선 과제"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동관 대변인은 "현재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살리기와 일자리 만들기"라며 "한국은행에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주문했다"고 밝혔다. 인수위는 특히 물가와 부동산값 안정을 위해 한국은행이 적극적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으로 이해상충이 있다는 부분도 인정했다. "지나친 통화량 조절로 경제가 위축될 경우 당선자의 성장공약과도 어긋난다"는 내용이다. 어려운 대내외 경제상황과 함께 새 정부로부터 쉽지 않은 역할을 부여받은 한은의 판단이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