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은 독일 브랜드다. 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파사트는 북미 버전이다. 폭스바겐은 현재 파사트를 이원화하여 운영하고 있다. 유럽 시장에서는 지난해 3/4분기부터 판매를 시작한 8세대 파사트를, 미국 시장에서는 차량의 셋업을 바꿔 지난 2011년 첫 공개한 북미 버전의 파사트를 최근 페이스 리프트와 상품성 개선으로 경쟁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말리부와 달리 북미 시장에서 파사트의 존재감은 그리 강렬한 편은 아니다. 말리부의 경우 9세대 말리부의 출시와 함께 판매량이 늘어난 것에 반해 파사트는 페이스 리프트 이전이나 페이스 리프트 이후로나 판매량이 크게 늘지 않아 현재 월 간 판매량은 말리부의 25~30% 남짓인 6~7천대에 머물고 있다.
두 차량이 모두 출시된 한국 역시 시장의 반응은 미국과 비슷한 편, 9세대 말리부에게는 말 그대로 뜨거운 환호를 보내며 폭발적인 판매가 줄을 이으며 출시 이후 사전 계약에서만 이미 1만 5천 대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최근에도 이 인기가 이어지고 특히 당초 예측과는 달리 2.0 터보 모델과 19인치 휠 등의 과수요가 이어지며 고객들의 기다림이 더욱 길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두 차량은 풀 모델 체인지로 모든 것을 바꾼 올 뉴 말리부와 페이스 리프트를 통해 상품성을 강화한 파사트의 대결인 만큼 전체적인 부분에서는 ‘최신 제품’인 말리부 쪽이 분명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체격만 보더라도 중형 세단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파사트에 반해 올 뉴 말리부는 4,925mm에 이르는 전장을 자랑하며 말 그대로 ‘클래스를 뛰어넘는’ 커다란 차체를 자랑한다. 여기에 휠 베이스 역시 90mm 가량 늘어난 2,830mm에 이른다. 차체가 커질 경우 주행 성능의 하락이 이어질 수 있으나 쉐보레는 말리부의 무게를 약 130kg 가량 덜어내는 방법을 찾으며 커진 차체로 돌아올 부작용을 예방했다.
사실 파사트의 전장은 올 뉴 말리부와 비교하자면 다소 짧게 느껴지는 4,870mm다. 전폭과 전고는 1,835mm와 1,485mm로 동급의 중형 세단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휠베이스 역시 2,803mm로 국내에 시판되고 있는 다른 중형 세단들과 비교해 특별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말 그대로 중형 세단 시장의 기준을 뛰어넘는 건장함을 가진 말리부와 중형 세단 시장의 기준을 잡는 파사트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어코드가 그랬듯 4,900mm의 벽을 허문 말리부인데 과연 말리부에 이어 어떤 차량이 4,900mm가 넘는 전장을 자랑하게 될지 그 부분도 벌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담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올 뉴 말리부는 쉐보레의 아이코닉 쿠페 카마로의 아이덴티티를 품으며 더욱 강렬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자아낸다. 8세대까지 이어진 투박함을 벗는데 성공하며 중형 세단 시장에서 말리부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물론 여기에 날렵한 실루엣의 헤드라이트와 꺽쇠 모양의 LED DRL 역시 매력 포인트로 자리한다.
특히 측후방에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유려한 루프 라인과 C필러, 도어 패널의 절묘한 라인 배치는 물론 후면의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척 우수한 편이다. 감각적인 라인과 디테일이 돋보이는 요소들이 어우러지며 아우디의 스포트백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도어 패널에 말리부 레터링을 새겨 넣는 ‘미국의 감성’ 역시 잊지 않았다.
측면과 후면 역시 크롬 디테일을 더하기는 했지만 파사트 고유의 담백하고 간결한 이미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면과 측면, 후면에 걸쳐 크롬이 중심이 되는 ‘미국식 드레스 업 튜닝’을 거친 느낌이 들지만 확실히 기존의 파사트와 비교 했을 때 존재감이 한층 강렬해진 것은 분명하다.
올 뉴 말리부는 외관 디자인은 변화만큼이나 실내 공간에서도 큰 변화를 적용했다. GM 브랜드에서 최근 새롭게 적용되고 있는 듀얼콕핏 2.0은 무릎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센터페시아 하단을 도려내고 센터페시아와 실내 공간 전체를 감사는 듯한 랩어라운드 디자인을 적용해 디자인 완성도와 함께 실내 공간의 쾌적함을 동시에 추구했다.
다양한 정보 전달과 쾌적한 시인성을 자랑하는 새로운 디자인의 계기판과 더욱 세련된 이미지와 소프트 타입의 버튼을 적용한 스티어링 휠 그리고 보스 사운드 시스템과 호흡을 맞추는 8인치 디스플레이와 다양한 기능을 지원하는 마이링크는 운전자에게 높은 만족도를 제공한다. 물론 무선 충전 시스템도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다.
시승을 진행하며 두 차량 모두 완성도 높은 파워트레인의 채택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올 뉴 말리부는 과감히 2.0L 자연흡기 라인업을 제외시켰다. 다운사이징 추세에 발맞춰 직렬 4기통 2.0L 자연흡기 에코텍 엔진을 대체하는 직렬 4기통 1.5L 에코텍 터보 엔진과 Gen 3 6단 자동 변속기를 조합했다. 반면 파사트의 경우에는 최고 출력 170마력 25.4kg.m의 토크를 확보한 1.8L TSI 엔진과 6단 자동 변속기(팁트로닉)를 조합했다. 파사트의 엔진은 워즈오토 10대 엔진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력이 있는 ‘검증된 엔진’이다.
2.0L 자연흡기 엔진의 존재 가치에 물음표를 달 만큼 두 차량 모두 출력에서는 큰 부족함이 없다. 두 차량 모두 넉넉한 토크를 낮은 RPM부터 활용할 수 있는 만큼 발진 부분에서는 흠 잡을 데가 없다. 특히 올 뉴 말리부는 가벼운 차체가 더해지면서 정지 상태의 발진 감각은 동급 중형 세단 중 가장 경쾌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차량의 움직임은 두 브랜드의 본토를 떠올리게 한다. 말리부의 경우 견고한 섀시에 부드러운 서스펜션에 여유로운 조향을 갖춰 범용적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움직임을 지향한다. 물론 고속 주행이나 와인딩 주행에서는 약간의 롤링을 허용하지만 출렁거리지 않도록 제어한다. 여기에 농익은 서스펜션의 세팅을 바탕으로 만족스러운 주행을 가능하게 만든다.
차이가 있을 뿐 두 차량 모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만큼 드라이빙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상당하기에 둘 중에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제동 성능이나 제동력의 유지 부분에서도 두 차량 모두 일상 주행 이상의 범주에서도 신뢰를 잃지 않아 운전자에게 만족감을 제공한다. 말 그대로 ‘기본기 좋은 미국 세단’과 ‘기본기 좋은 독일 세단’의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차량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중형 세단’이라는 것과 ‘탄탄한 기본기 위에 뛰어난 상품성을 담은 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차량 모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꾸준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게다가 가격 정책도 무척 공격적인 상황이다. 말리부의 경우 풀옵션은 3천 만원 대 중반까지 치솟지만 2,300만원 대부터 시작하는 가격 정책을 환영할 가치가 존재하며 파사트 역시 3천 만원 대 중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건 소비자의 선택이다. 우수한 기본기 위에 넓은 공간과 풍요로움을 품은 말리부와 탄탄한 드라이빙과 독일 브랜드의 가치를 담은 파사트라는 선택지가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어떤 선택에든 첨언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두 차량 중 분명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두 차량은 소비자에게 기대 이상의 만족도를 줄 수 있는 그런 차량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