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으로 일컬어져온 두 전직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에서는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대통령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영원한 ‘맞수’이자 ‘경쟁자’였다.
YS가 스스로 생전에 DJ와의 사이를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로 표현했던 것처럼,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출발점 달랐지만, 40대 기수론 제창 후 지도자로 성장 = 정계 최대 맞수였지만 출발점은 확연히 달랐다. DJ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한 뒤 사업을 하다 정계에 뛰어든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1954년 선거에서 낙선한 뒤 1961년 4·19혁명으로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지만 5ㆍ16군사 쿠데타로 당선 3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고 1963년 6대 총선에서야 비로소 정치권에 입문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부터 순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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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지역과 정치적 배경이 달랐던 만큼 두 사람은 야당과 여당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YS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위한 4사5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하면서 DJ와 한 배를 탄다.
야당인 신한민주당에서 YS와 DJ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치 보폭을 넓혀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 때 YS과 DJ가 처음으로 맞붙었다. YS 승리였다. 이후 YS는 원내총무를 5차례 맡으며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 성장했다.
YS가 국민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것은 1970년 9월 제창한 ‘40대 기수론’부터다. 당시 신민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한 후 깊은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이 때 40대의 YS가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DJ 정치활동 금지로, YS가 유신독재에 온 몸으로 맞서 =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유진산 총재가 타계하자 47세에 최연소로 제1야당 총재에 올랐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며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이끌었다.
1979년에는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하게 됐고,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까지 당했다. 부마사태에 이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종언을 고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YS와 DJ, 박 정권 아래서 정치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김종필(JP) 자민련 전 총재까지 함께한 본격적인 3김 시대가 열렸다.
그것도 잠시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로 정치활동이 다시 금지됐다. DJ는 신군부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DJ가 1985년 귀국할 때까지 국내에서 신군부와 맞선 사람은 YS이었다.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군부 강압통치에 숨죽여있던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7년 6·10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다.
YS와 DJ 모두 대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여당 후보이던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됐다.
훗날 DJ는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YS와 DJ 모두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두 사람은 1990년 이후 2009년 DJ가 눈을 감을 때까지 대립하고 반목했다. DJ는 3당 합당 이후 어제의 동지였던 YS를 공격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리며 DJ를 비난했다.
YS는 보수세력, DJ는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DJ가 서거하던 2009년까지 이어졌다. YS가 그 해 8월 DJ를 전격 찾아가 문병한 뒤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이제 3김 중 남은 사람은 JP 뿐이다. JP는 YS가 운명을 달리하자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제외하고는 맨 처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JP는 YS와 3당 합당을 함께 했고 DJ와는 1997년 DJP연대로 정권교체에 동참했다. 공통분모는 내각제 개헌이었다. 3당 합당의 명분도 내각제 개헌이었고 DJ와 손을 잡은 것도 내각제 개헌 추진이었다. JP가 그토록 열망한 내각제 개헌은 다 무위로 그쳤다.
이날 빈소를 찾은 JP는 “내가 해준 것 아무것도 없지만 국회에서 제명할 때 난 반대했거든. 다 찬성을 했는데, 근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걸 아셨는데, 나한테 아무 말도 뭐라고 안했어. (YS가) 하신 말씀 많이 있는데, 그중에 잊혀지지 것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유형 무형으로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내 신념 꺾지 못하고 역사는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신뢰의 분이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신뢰를 끝끝내 관철하신 분이야”라고 회고했다.
상주인 김 전 의장이 “오래 사셔야 된다”고 하자, JP는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이 나이되면 오래 사는 것도 사회의 짐이요. 적당한 때 불러 주시길 바래”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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