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서거]승부사 YS,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다

1954년 27세 최연소 나이에 국회의원 당선 후 9선 최다선 기록
40대 기수론으로 야당 총재, 유신독재 맞서다 의원직 제명 당해
23일 단식 등 6·10 민주화운동 주도, 3당 합당으로 문민정부 창출
하나회척결·공직자 재산등록·금융실명제 등 민주주의 기본 틀 완성
  • 등록 2015-11-22 오후 5:12:19

    수정 2015-11-22 오후 8:26:10

[이데일리 선상원 기자] 평생을 거침없이 살았던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40년 동난 한국 정치사를 쥐락펴락한 ‘3김 시대’의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 중 한 거목이 또 쓰러졌다. 김 전 대통령(YS)은 27세이던 지난 1954년 3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최다선 기록은 우리 의정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YS는 결단의 정치인이다. 결단과 소신, 용기를 빼놓고는 YS를 설명할 수 없다.

헌정사 최초 의원직 제명, “영원히 사는 길 택할 것”

중학생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여놓고 대통령의 꿈을 키운 YS는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여당 의원 시절도 잠시,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결연히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후 1991년 3당 합당 때까지 30여년을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화 투사로 살았다.

야당을 회생시킨 1970년 ‘40대 기수론’도 YS가 먼저 치고 나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했던 신민당은 3선 개헌안마저 압도적으로 통과되자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이때 YS는 “빈사상태에 빠진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뒤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이철승 전 헌정회 회장이 경선 참여를 선언해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개헌운동을 추진하던 YS는 1974년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에 오른 뒤 1979년 5월 다시 총재에 복귀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이 시작됐고 결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와 신민당사 YH여공 농성 사건이 빌미가 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의원직 제명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YS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줄기찬 반 유신투쟁에 박정희 정권은 10·26 사태로 종언을 고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중심의 신군부는 1980년 5·17조치로 강압 통치를 이어갔다. YS는 기나 긴 자택 연금조치를 당했다.

YS는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인다. 식음을 전폐하고 무려 23일 동안이나 전개했다. 군부독재에 균열을 낸 YS는 이후 DJ와 함께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신민당 창당과 2·12 총선 돌풍, 1986~1987년 직선제 개헌 운동 및 6·10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6월 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3당 합당 결단

1990년 1월 3당 합당은 승부사라는 YS 별명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사건이다. YS는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군부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으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여당의 2인자로 변신해 2년 만인 92년 5월 민자당 후보로 선출돼 같은 해 대권까지 거머줬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YS는 문민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면서 중단 없는 변화와 개혁을 천명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31년 만에 대한민국에 문민시대를 연 것이다.

취임하자마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당시 하룻밤 사이에 떨어진 별이 50개로 당시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케 한다. 1993년 8월에는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고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12·12 쿠데타와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했다.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도 이뤄졌다.

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손학규 등 정계 발탁

YS의 결단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덕분에 집권 초에 90%에 달하는 지지율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 정권 말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되자 하락세를 걷게 된다. 급기야 1997년 12월 6·25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를 맞았다.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오랜 군사통치의 종지부 찍는다는 건, 하나회 청산이라는 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융실명제도 여러 평가 있지만 역량 없으면 안된다”고 YS의 공적을 평가했다. 빈소를 찾은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역대 정부 중에 제일 효율적으로 단시간 내에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되시고 나서 얼마나 개혁적인 일을 했는지는 역사가 나중에 증명할 거”라고 화답했다.

결단의 정치인답게 YS는 용인술에도 능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모두 YS가 발탁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당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정의화 국회의장도 YS 사람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민중당을 결성해 활동하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재오 의원을 각각 영입해 의원으로 만든 것도 YS다. 상주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 전 의장,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상도동계는 YS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영원한 동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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