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두산이 참이슬을 마시는 까닭

  • 등록 2010-05-14 오후 3:43:28

    수정 2010-05-14 오후 7:32:15

[이데일리 김수헌 기자] 얼마전 지인(知人)을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는 두산그룹에 다니고 있었다. 주문을 받던 종업원이 "술은 뭘로 하겠냐"고 물었다. 필자는 "소주로 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지인은 종업원에게 "`참이슬`로 달라"고 말했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두산 직원이 `처음처럼`이 아닌 `참이슬`을 주문하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처음처럼`은 두산이 갖고 있던 소주 브랜드였다. 두산은 지난해 주류사업을 롯데에 넘겼다.

두산 `처음처럼`과 진로 `참이슬` 간 시장 쟁탈전은 전쟁 수준이었다.

소주시장 1위 `참이슬`을 따라잡기 위해 두산의 주류사업 담당자들은 부단히 노력했다. 마케팅은 치열했고 비방전도 끊이질 않았다.

두산이 `처음처럼`을 롯데에 넘겼을 때, 필자는 그래도 두산 사람들은 오로지 `처음처럼`만 마실 줄 알았다. 참이슬과 벌여온 싸움의 과정들을 잘 알기에.

그래서 필자가 지인에게 물었다. "정말 참이슬을 시켜도 되냐"고. 돌아온 답에 필자는 무릎을 탁쳤다.

"두산 계열사 중 삼화왕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병뚜껑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회사가 `참이슬`에 병뚜껑을 납품하죠. 그러니 `참이슬`을 한병이라도 더 마셔야 두산에 도움이 되는 겁니다"

`처음처럼`은 다른 기업에 팔렸다. 삼화왕관은 `참이슬`에 병뚜껑을 납품한다. `처음처럼`에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참이슬을 마시는 건 당연하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이것이 비즈니스의 세계라는 거다.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

구글과 애플도 그랬다. 두 회사는 더없이 가까운 형제였다. 아이폰에 구글의 검색엔진이 탑재될 때만 해도 그랬다. 둘 간 동맹은 굳건했다. 애플이 아이폰을 발표했을 때 구글 CEO 에릭 슈미트는 잡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우리는 애플구(애플+구글)"라고 말했다.

그런데 두 회사는 이제 등을 돌린 사이가 됐다. 등을 돌린 정도가 아니다. 상대를 찔러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검투사가 됐다. 올해초 구글이 휴대전화업체 HTC와 손잡고 스마트폰 '넥서스원'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구글은 애플 아이폰과 전면전을 선포했다.

잡스는 애플 직원들 앞에서 구글을 향해 욕설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애플은 최근 HTC가 아이폰의 사용자 환경(UI)과 하드웨어 등에 대한 20건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제소했다.

요즘 삼성전자와 KT간 비즈니스를 둘러싼 감정싸움이 업계에 회자되고 있다.

이석채 KT 회장이 지난달 무역협회 초청 조찬회에서 "쇼옴니아는 홍길동"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삼성전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신세라는 것이다.

이 회장은 "(KT가 판매하는) 쇼옴니아는 WCDMA, 와이파이(무선랜), 와이브로 등 3W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데 삼성이 작게 광고했다"며 "대신 SK텔레콤과 연합해 옴니아2만 팔았다"고 말했다.

이어 "비즈니스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며 "감정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 회장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자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주력 단말기를 SK텔레콤에 우선적으로 주는 등 차별한데 대한 KT의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KT가 아이폰을 도입한 이후 삼성전자로부터 단말기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삼성전자측은 "우리야 말로 진짜 홍길동"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KT에 납품해야 하는 을(乙)의 입장이라, 할 말 다 못하는 홍길동 신세라고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와 KT간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게 아닌가` 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은 없어 보인다.

참이슬을 마시는 두산맨, 형제에서 원수로 변한 애플과 구글을 보건대 그렇다.

더구나 삼성전자와 KT는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 경쟁제품을 만드는 사이도 아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서로에 대한 필요성'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두 회사가 다시 뜨겁게 손을 잡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영원과 적도 동지도 없다는 비즈니스 세계의 '진리'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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