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달 8일 간송 미술문화재단에서 구입한 보물 2점의 위작 논란에 대해 딱 잘라 말했다.
국립춘천박물관장·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지낸 최 교수는 불교 미술분야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현재는 동국대 박물관장, 한국미술사교육학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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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 유물은 위작 논란이 일면서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두 불상의 제작 시기와 국가, 양식이 비슷한 시기의 다른 불상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수십 년간 창고에 보관했던 문화재가 진품인지 가품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의견도 제기됐다. 간송 미술관이 전시를 1년에 단 2번밖에 열지 않는 데다, 전시 기간에도 일부 문화재만 전시하기에 문화재 전문가들이 실제로 두 불상을 접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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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차이 보이는 불상과 대좌..왜?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은 높이 38㎝로 삼국, 통일신라 시대 불상 중에서 가장 큰 편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동불상과는 달라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불상은 팔각 연화대좌 위에 정면을 보고 섰으며, 살짝 오므린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이와 관련, 강삼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는 “굉장히 특이한 모습인 것은 사실이지만 비슷한 모습의 불상으로 양양 서림리에서 출토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다”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제작됐기 때문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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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지역으로 ‘위작’ 단정은 적절치 않아”
보물 제285호 금동보살입상은 높이 18.8㎝로 과거 신라 지역이었던 경남 거창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손을 앞으로 모아 보주를 받들어 올리고, 양옆으로 뻗은 지느러미 같은 옷자락 등 백제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봉보주보살상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슷한 유물로는 ‘백제미소’로 불리는 백제시대 대표 불상인 국보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의 좌협가 등이 있다. 7세기경 조성된 일본 호류사의 구세관음과도 유사하다.
신라의 옛 땅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봉보주보살상은 현재까지 금동보살입상이 유일하다. 최 교수는 “금동 불상은 충분히 이동 가능하며, 출토 지역도 정확하지 않다”며 “이를 두고 위작이라 하는 것은 억측”이라고 말했다.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했던 신라는 불교미술의 발달이 늦어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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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가치 재평가 필요…지금과 과거 기준 달라”
두 보물에 대한 가치를 재평가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두 유물이 보물로 지정되던 시기와 지금의 문화재 가치 산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그때와 지금의 보물 지정 기준은 많이 틀리다. 당시는 불교 조각품이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던 때가 아니었다”며 “지금 기준에서 보면 걸작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 교수는 “간송의 안목도 굉장히 높았지만 당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술사, 고고학, 역사 등의 분야에서 최고였던 사람들”이라며 “간송은 이들의 철저한 검증을 받은 후 문화재를 구입했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간송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있다. 오세창은 민족 미술의 대계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은 간송을 만났다. 오세창은 간송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다.
이런 가르침 덕에 간송이 지킨 귀한 보물 중 하나가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일제는 당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훈민정음 언해본이 18세기 만들어진 위작이라며 허구의 문서라 주장한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해례본도 찾아 없애고자 한다. 하지만 간송이 해례본을 지켜낸 덕에 현재까지 한글의 창제 원리가 전해지고 있다.
또 간송은 미술관 ‘보화각’을 설립하고 민족사학인 보성학교를 인수해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이곳에서 청전 이상범, 춘곡 고희동, 남운 이흥직 등 한국 근현대 문화계 총아들이 문화재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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