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김근태, 파국으로 치닫는 18년 애증

`인파이터`와 `햄릿`이 연출했던 정치드라마
  • 등록 2007-05-04 오후 8:40:00

    수정 2007-05-04 오후 8:40:00

[프레시안 제공]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89년 3월, 초선으로 5공 청문회 스타 반열에 오른 후에도 파업현장을 뛰어다니던 노무현 의원과 재야의 기린아 김근태 전민련 정책실장의 첫 대면이 이뤄졌다.

이근안의 고문과 소 파동으로 인한 농민 자살 사건을 화두로 6시간 동안 소줏잔을 부딪힌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이 자리에서 노 의원은 한 살 아래지만 까마득한 운동선배인 김 실장에게 "평소에 연모해 왔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2007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을 향해 여당 몰락의 책임을 물었고 김 고문은 "상왕(上王)이냐"고 맞받아쳤다. 노 대통령의 한 측근은 김 전 의장을 향해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당을 떠나라"고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대로 다음 대선, 아니 그 이후에도 어떤 출렁임이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노무현-김근태, 두 사람이 '드디어 갈 데까지 갔다'는 점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2001년부터 시작된 균열

노태우 정부 시절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10여 년이 지나도록 남달랐다. 1992년, 김근태 당시 전민련 집행위원장은 자신의 석방 기념회에 참석한 노무현 의원에게 "우리 시대의 정치적 희망"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여권의 동량으로 서기 시작했던 2000년 경 두 사람의 '밀월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가 적지 않다.
한 대학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두 사람은 "우리 둘은 언제나 함께 간다"며 "DJ와 YS처럼 분열의 길은 없다"고 청중들에게 약속했다. 남들은 '김칫국 마신다'고 비웃었지만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김근태하고 나하고 가위바위보로 (대권에 도전) 하면 어떨까"라고까지 말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이처럼 애틋한 관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1년 두 사람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갈등은 본격화됐다. '민주후보 단일화'론이 제기되자 '노무현 상임고문'은 "국민 지지율로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김근태 고문'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성은 내가 더 크다"고 맞섰다.

이른바 '운동권 주류·비주류 갈등' 끝에 단일화 논의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노 고문은 격정적 연설과 영남후보론을 내세워 결선티켓을 거머쥐었다. 김 고문은 회심의 카드로 '불법 정치자금 고해성사'를 들고 나왔지만 돌아온 것은 '정치를 모른다'는 비웃음뿐이었다.

'민주화의 상징' 김근태와 '늦깍이 운동권' 노무현의 처지가 역전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노 대통령'과 충돌한 '김근태 장관'의 소신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하던 2002년 여름, '김 고문'을 호출했지만 김 고문은 '정몽준과 범여권 후보 단일화' 카드에서 의구심 어린 눈길을 거두지 앉았다. '통합이냐 선명노선이냐'는 갈등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다만 대통령 선거, 열린우리당 창당, 탄핵, 총선 등 여야의 대결이 격화되는 동안은 두 사람의 관계도 나쁘지 앉았다.

하지만 총선 이후 통일부 장관을 원하던 '김근태 우리당 고문'이 우여곡절 끝에 복지부 장관으로 내각에 들어간 뒤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번도 상승곡선을 그리지 못했다.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해보자"고 모처럼 결기를 세웠던 분양원가 공개 논란, 연기금의 사회간접자본 투자 논란 등 '김근태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과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장관과 대통령 간 갈등의 귀결점은 뻔했다.

일반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김 장관이 소신을 지킨 사례도 없진 않았다. 대통령부터가 "감전된 것 같다"고 극찬하고 정부의 '묻지마 지원'이 이어지던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신중론을 펼쳤던 몇 안되는 고위 인사 가운데 김 장관을 빼놓을 순 없다는 평가다.

또한 김병준, 황우석, 노성일(미즈메디 병원 원장), 이상호(우리들 병원 원장) 등 노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인사들이 포진한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에서 영리병원 도입의 저지선 역할을 했던 것도 김근태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런 '저항'이 대중적 인기로 연결되진 못했다.

"정치적 수는 상대가 안 된다"

2006년 여름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비대위원장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당권을 쥔 '김근태 의장'은 "이젠 옛날의 김근태가 아니다"는 투지를 불태웠다.

사회적 대타협을 내걸고 전경련, 민주노총 등을 연달아 방문하며 '뉴딜 정책'을 내걸었지만 청와대에선 '누구 마음대로 그런 약속을 하냐'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김 의장 측에선 "바닥을 치고 올라가겠다고 애쓰는데 이렇게 안 도와주냐"는 볼멘소리만 내놓을 뿐 제대로 된 항변 한번 하지 못했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인사파동 당시 당내의 '반노(反盧) 여론'을 등에 엎고 김 의장이 반란을 꾀했지만 결과는 또 다시 '완전 진압'.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 대통령의 '탈당 불사' 발언을 들은 김 의장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한다"고 꼬리를 내렸다. 김 의장에게는 "김근태는 어쩔 수 없다. 정치적 수는 노무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가 다시 뒤따랐다.

애는 썼지만 별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당권을 내놓은 '김근태 의원'은 뒤늦게 "나를 밟고 가라"며 한미FTA 반대 대열에 합류했지만 노 대통령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처럼 2001년부터 부침을 거듭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열린우리당 존속 여부에 대한 좁힐 수 없는 이견으로 인해 봉합하기 힘든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전술적 동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7년 여 간 나타난 두 사람의 갈등상은 대체로 노 대통령의 완승으로 정리되곤 했다. 이번 사태 역시 노 대통령과 측근 인사들이 맹공을 퍼붓지만 김 전 의장 측은 말을 아끼고 있는 형국이다.

이같은 상황은 권력의 저울추가 대통령 쪽으로 기운 탓도 있지만 '인파이터 스타일'인 노 대통령과 '햄릿 형'인 김 전 의장의 스타일 차이도 한 몫 했다는 평가다.

물론 이라크 파병, 분양원가 공개, 한미FTA 등 정책적 현안에서 김 전 의장이 노 대통령보다는 진보적인 위치에 서 있기도 했다. 김 전 의장은 지금도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있다.

그렇지만 5.31 지방선거 완패 이후 김 전 의장이 기업인 사면, 출총제 완화 등 보수적 정책을 들고 나왔던 점을 감안하면 그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범여권 인사들은 '대선을 앞두고선 어떤 식으로든 다시 뭉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 와중에 노 대통령과 김 전 의장도 다시 한 배를 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무현과 김근태의 18년 인연'이 정치적 갈등을 넘어 신뢰 상실의 단계로 접어든 지 오래라는 점이다. 이는 향후 전술적 동거는 가능할지 몰라도 신뢰 회복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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