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회고록에 드러난 일부 재벌총수의 경우 여야 정치권을 넘나들면서 정치자금을 제공하거나, 구체적인 정치현안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등 정경유착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회고록에서 가장 주요하게 등장하는 재벌총수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다. 박 전 의원은 신 회장과 국내 뿐 아니라 일본 등지에서 수차례 만나면서, 정치권 동향과 정국 운영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 신격호 회장 : YS와 화해 권유부터 북의 전쟁가능성까지 언급
특히 90년 3당 합당을 전후로 신 회장은 여당은 물론 YS와 DJ 등 야당 정치인까지 넘나들면서 활발한 접촉을 벌였다.
박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신격호 회장과 YS는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다. 자금 지원도 상당히 해주고 있는 듯하고 깊은 대화를 나눈다. 신 회장을 자주 만나 올바른 정보도 파악하고, YS에게 합당을 권유하도록 부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신 회장은 정계개편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고, 변화무쌍한 YS의 마음을 합당으로 돌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라고 책에서 전하고 있다.
이어 3당 합당 직전인 89년말께. 신 회장은 박 전 의원을 만나 보다 구체적인 정국 구상을 전달한다.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김영삼씨가 수상, 김종필씨가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회고록을 통해 드러난 신 회장의 구상이다. 물론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한 달 후인 10월 3일께. 박 전 의원은 신 회장과 다시 만난다. 신 회장은 전날인 2일 점심과 저녁시간에 이미 DJ와 YS를 연이어 만났었다. 신 회장은 박 전의원에게 "YS가 박 전 의원(당시 정무장관)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다", "박 전 의원의 협조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는 말을 전했다.
신 회장은 또 "북한이 급격하게 개방돼 김일성이 궁지에 몰리면 미국과 남한측의 북침을 가장하여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으니 유의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 이건희 회장 : 이권 청탁이나 정치자금 건넨 적 없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해서는, 박 전 의원은 "(이 회장이) 한번도 이권과 관련된 부탁을 한 일 없고, 정치자금 지원 같은 것도 벌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힘든 야당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공개 행사장에서 가끔 반갑게 얼굴을 마주하는 정도지만 매우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
박 전 의원이 이 회장을 처음 만난 때는 지난 71년 무렵. 이건희 회장은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다. 이 회장을 중간에서 연결한 사람은 당시 삼성그룹 고문변호사였던 인형무씨. 인 변호사는 서울대 문리대 출신으로 박 전의원과는 61학번 동기였다. 이후 박 전 의원은 이 회장과 80년부터 91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만났다고 전했다.
그는 "80년부터 91년까지 셋이서 또는 이 회장과 둘이서 신라호텔 로열스위트룸이나 개인 영빈관 등지에서 식사를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고 썼다. 이어 소탈하고 직선적인 성격인 이 회장의 세계정세 분석과 미래전망, 정치방향과 경제흐름에 관한 의견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박 전 의원은 밝혔다.
. 김우중 회장 : 직원 50명이 몇백번 회식할 정치자금 전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 부분도 잘 묘사돼 있다. 지난 88년 4월26일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박 전 의원은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에서 김 전 회장을 만났다.
박 전 의원은 "(김 전 회장으로부터) 별다른 부탁 없이 6공화국이 잘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자리를 일어나면서 직원들 회식하라며 봉투 하나를 주길래, 몇차례 거절하다가 성의상 받아왔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청와대 사무실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직원 50여명이 회식을 몇 백번하고도 남을 큰 돈이어서 어처구니 없었다"면서, 이후 김 전 회장을 다시 만나 봉투를 되돌려 주려고 했지만 '나라를 운영하려면 자금이 들텐데... 아무 조건없이 도와드리는 것'이라며 김 전 회장이 한사코 만류했다고 회고했다.
박 전 의원이 다시 "자신은 경제정책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큰 돈을 받으면 김 회장과 저의 관계가 이것으로 끝난다"고 하자, "정치인들을 많이 도와드렸는데, 박 보좌관 같은 분은 처음"이라고 말한, 김 전 회장의 발언을 전하기도 했다.
박 전 의원은 이후 김 전 회장과 몇차례 개별적으로 만났으며, 대북정책과 공산권 문제 해결과정에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