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먹은 밥그릇 수가 모든 가치를 앞서던 시절, 선배는 후배에게 위엄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연공서열이란 가치가 붕괴된 지금은 능력과 실적이 최고의 가칩니다. 이 면에서 뛰어난 후배라면 선배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성과주의는 장유유서의 뿌리가 깊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생소한 개념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명예퇴직`이란 말도 이제는 수시로 듣게 됐습니다. 평생직장이라뇨, 이제 사전에서나 볼 수 있는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외환 위기 이후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변화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글로벌 스탠다드`. 마치 새마을 시대 구호처럼 파고 들며 이같은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우리의 무의식에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은 몹쓸 기득권인양 아로새기며 말이죠.
그런데 이에 비해 일본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본의 기업 문화야말로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대표됐지만, 최근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겉 모양새는 이렇게 `글로벌`해지고 있지만, 속 사정은 꼭 그렇지도 않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식 자본주의의 단물을 빨아들이되, 자국 문화와 접목시킨 `일본식 자본주의`가 영글고 있다고 할까요. 그걸 두고 잡지는 일본 기업들의 하이브리드(Hybrid) 모델, `재팽글로-색슨 자본주의(JapAnglo-Saxon capitalism)`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런던 킹스칼리지와 와세다 대학의 두 전문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723개 일본 기업 가운데 이런 하이브리드 모델을 채택하고 있는 곳이 24%였고, 42%는 전통적인 일본 기업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채택하고 있는 기업의 94%는 종신고용을 택하고 있다고 하네요. 42%에 해당하는 전통 기업들은 모조리 종신고용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두 모델을 잘 접목시키고 있는 하이브리드 기업, 도요타와 NTT도코모, 캐논, 야마하, 히다치, 미츠비시 등이 더 나은 성과를 내고 있으며, 일본이 더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서구식 결론을 강조했지만, 제 결론은 달랐습니다.
자국의 사회 문화적 가치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글로벌을 지향하는 일본식 접근법이 새삼 놀라웠던 것이죠. 글쎄, 겉도 속도 다 내 준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자니, 정말 `일본스럽다`는 걸 느꼈다고나 할까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최근 서평 기사에서 봤던 한 책은 마침 일본식 연공제의 장점을 짚었다고 해서 주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동경대 경영학부 교수가 쓴 책인데요, 능력과 실적에 따라 일의 내용이 가속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일본식 연공제이며, 오히려 장기적 성과를 내기엔 이 제도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하는군요.
경영자로선 인원과 각종 비용을 줄이면서 성과 위주 경영을 함으로써 효율성을 기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단기적으론 그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감축이란 선택을 위해선 분명 따로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있을 겁니다. 그게 많다면 효율적일 순 없겠지요.
또한 성과주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선 객관적이면서도 공감을 불러 올 수 있는 평가 제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겁니다. 기반이 잘 갖춰지지 않은 채 어설픈 하이브리드를 지향하기 보단 때론 차라리 뿌리깊은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과연 일본의 하이브리드 모델이 앞으로 더 어떻게 전개될 지도 궁금해지는군요. 더 서구식으로 나갈 지, 아니면 더 일본식을 고수할 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