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 GM이 지난해 근로자 퇴직연금과 의료보장에 쓴 돈은 5조원이 넘습니다. 경영위기에 봉착한 GM은 지난해부터 이미 감량에 돌입했습니다. 세계 최대 컴퓨터 서비스업체 IBM, 알루미늄 대기업 알코아, 휴대폰 업체 모토롤라와 통신업체 버라이즌, 휴렛패커드 등도 퇴직연금이나 의료보장 수혜를 잇따라 중단 내지 축소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에 진출한 일본기업들까지 발빠르게 추세에 동참하는 분위깁니다. 일본의 닛산자동차는 미국 현지공장 퇴직자들에 대한 의료보장 혜택을 중단하고 대신 매년 2500달러씩 연금을 지급키로 했습니다. 의료비 자체를 부담하기 보다 돈으로 얼마씩 줄테니 그 범위내에서 의료비로 충당하라는 얘기죠.
기업입장에서 DB형을 DC형으로 바꾸거나, 의료보장 수혜를 연금으로 대신하면 무한책임을 유한책임으로 낮출 수 있게 됩니다. 과도한 비용부담을 줄이고 기업지출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겠죠.
월스트리트저널은 GM 사례는 2차 대전후 전성기에 미국 기업과 근로자간에 체결했던 계약 시스템이 붕괴되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미국 기업들이 국가 기능을 대신해가며 근로자들의 노후를 보장해주던 시대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거죠. 시사주간 타임은 지난해 이미 `깨어진 약속`(The Broken Promise)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회사에 있는 동안 열심히만 하면 퇴직후 나머지 인생은 책임져 주겠다는 약속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전했습니다.
미국이 선진국중에서는 재정을 통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도 이유로 지목됩니다. 비용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의료보장은 기업들이 국가의 기능을 대신해 온 경우입니다. 미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주도의 의료보험 시스템이 없는 유일한 선진국입니다.
기업들이 국가 기능까지 대신해가며 우수 인력을 확보해야 했던 시절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퇴직수혜를 줄여갈 기업들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기업들의 비용부담이 커지면서 경쟁력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치상으로 쉽게 확인이 됩니다. 최근 수혜중단을 발표한 기업들의 비용절감 규모는 보통 수조원대입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이같은 비용요인을 계속 안고 가기는 어렵죠. 문제는 비용절감의 1차 희생양이 늘 근로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미국 기업들은 구조조정 모드에 들어가면 비용부담 때문에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지만 기업 순익은 꾸준히 증가해 왔습니다. 대기업 중심의 S&P500지수 기업들의 분기 순이익은 지난 4분기까지 10분기 연속 두자릿수 행진을 기록중입니다.
사모펀드나 헤지펀드들이 M&A를 통해 기업에 진출한뒤 주주들의 투자금 회수 의지는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감량경영이고 이는 대부분 근로자 해고를 시발로 비수익 사업 매각, 알짜 자산 처분 등을 통해 이뤄집니다.
미국 기업들이 근로자들에게 각종 퇴직연금 수혜를 부여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용부담을 이유로 이를 중단하고 근로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은 또 다른 반작용을 불러오게 됩니다.
기업은 충성스럽고, 우수한 근로자들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기업이 담당하고 있던 사회안전망의 한 축은 가뜩이나 취약한 미국의 재정이 결국 짊어져야 합니다. 결과를 예측하기에 앞서, 미국 대기업들이 나도나도 근로자와 퇴직자들에게 비용부담을 전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 판단인지부터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